소피는 어린 아들딸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한다. 소피의 미모에 호감을 가진 수용소 장교가 수작을 건다. 그가 묻는다. 폴란드인이냐 공산주의자냐고. 소피는 답한다. 유대인도 아니고, 가톨릭 신자라고. “공산당원이 아니라고?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장교는 단호하다. “예수는 아이들을 나에게 보내지 않았다.” 그는 한 아이를 선택하라고 한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며. 소피가 선택할 수 없다고 하자 선택하지 않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한다. 소피의 입에서 “내 딸을”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한 군인은 울부짖는 딸을 안고 가스실 쪽으로 간다. 그런 딸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소피…. 대표적인 홀로코스트 영화인 <소피의 선택>(1982)의 명장면이다. 반인륜적 선택을 강요하는 극단적 상황에서 의지와 무관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소피의 그 후 삶은 사는 것이 아니었다. 죄의식에 빠져 절망과 슬픔의 심연 속에서 몸부림치던 소피의 선택은 자살이었다.
영화 같은 일이 최근 미국에서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의 주인공도 소피다. 어린 자식에게 부모 중 한 명을 선택하게 한 점은 영화와 다르다. 사건은 이달 중순 텍사스주 국경 도시 엘파소의 한 불법이민자 수용시설에서 있었다. 남편, 세 아이와 함께 온두라스에서 악명 높은 갱단 MS-13의 살해 위협을 피해 온 타니아는 직원에게서 기막힌 말을 들었다. “가족이 미국에 체류하려면 부모 중 한 명이 멕시코로 돌아가야 한다.” 불법체류자는 ‘멕시코 땅에 머물러야 한다’는 이민정책 탓에 두 차례나 멕시코로 쫓겨났다가 돌아온 터였다. 타니아는 가족 모두 가야 한다며 버텼다. 직원은 세 살 막내딸 소피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 중 누구와 함께 가고 싶니?” 소피는 “엄마”라고 대답했다. 아빠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아이들은 울며불며 아빠에게 매달렸다. 직원의 다음 말은 말문을 막히게 했다. “왜 우니? 네가 엄마와 가고 싶다고 했잖아?” 다행히 미국판 ‘소피의 선택’은 희극으로 끝났다. 건강 사유가 있는 경우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규정 덕분이었다. 소피는 심장 수술 전력이 있었다. 이 사실은 미 공영라디오 방송 NPR의 지난 15일 보도로 드러났다. 지난해 6월에는 국경순찰대원이 수용소 아이들을 조롱하는 일도 있었다. 네 살에서 열 살까지 아이 열 명이 “엄마, 아빠”를 부르며 울었다. 부모와 떨어진 지 24시간이 채 안된 아이들이었다. 한 직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오케스트라가 있군. 지휘자만 있으면 되겠군.” 비영리 탐사보도 매체 프로퍼블리카의 폭로로 사실이 알려졌다.
지난해 4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불법이민자 부모와 아이를 분리하는 이민정책을 도입한 후 벌어지는 반인권적인 장면들이다. 그 후 2300명의 아이들이 부모와 떨어졌다. 네 살이 안되는 아이들도 100명이 넘는다. 열악한 수용시설과 아이들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는 끔찍하다. 지난달 말 수용시설 두 곳을 돌아본 소아과 의사는 “고문시설 같다”고 abc뉴스에 말했다. 24시간 내내 불이 켜져 있었고, 아파도 의료시설에 접근할 수 없었다. 기본 위생관리는 물론 적절한 물과 음식조차 공급되지 않았다. 그는 “당신의 아이들이 거기 있다고 생각해보라”고 했다. 22년간 활동해 온 이민 변호사는 여덟 살 아이가 네 살 아이를 돌보는 상황을 AP통신에 고발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104명 정원에 약 350명이 수용돼 있는 현실을 폭로했다. 그는 NPR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비인간적인 걸 보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수용시설이나 그곳에서 나온 뒤 숨진 아이만 7명이나 된다.
오죽하면 최연소 하원의원인 민주당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수용시설을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비유했을까. 나치의 강제수용소 언급은 미국에서도 민감한 문제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그 비유가 지나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때 간첩이 있다는 이유 등으로 일본계 12만명을 수용소에 감금했다. 8만명은 시민권자였다. 시민권자조차 보호하지 않은 전력이 있기에 비시민인 불법이민자에게 헌법적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 걸 당연히 여기는 걸까. 내년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의 계산적인 반인종·반여성 혐오 발언은 극성을 부릴 게 뻔하다. 최근 오카시오코르테스를 비롯한 민주당 여성 초선 의원 4인방을 겨냥해 “너희 나라로 가라”고 한 말이 단적인 사례다. 유색인종이 미국을 지배할 것이라는 백인들의 우려에 편승한 포퓰리즘이다. 미 여성 작가 리베카 솔닛은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에서 “모든 것을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핵심 작업”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정확히 보고 이야기하는 게 정의 실현의 시작이다.
'이무기가 쓴 칼럼 > 편집국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집국에서16] 트럼프와 배넌의 결합, 한번으로 족하다(190621) (0) | 2019.06.20 |
---|---|
[편집국에서15]먼로 독트린은 살아 있다(190517) (0) | 2019.05.16 |
[편집국에서14]우리가 이들을 외면한다면(190412) (0) | 2019.04.11 |
[편집국에서13] 김정은, 워싱턴 갈까(190308) (0) | 2019.03.07 |
[편집국에서12]트럼프는 왜 '스타워스'를 쏘아올렸을까(190125) (0) | 2019.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