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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월드프리즘

[월드 프리즘29]미국 정치의 블랙홀이 된 우크라이나(191021/주간경향 제1348호)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가 9월 27일(현지시간) 워싱턴 조지타운대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터지면서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우크라이나가 클린턴 후보를 지지한 사실 또한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다. AFP연합뉴스


대통령 취임 후 2년여 동안 괴롭혀온 ‘러시아 게이트(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 캠프와 러시아의 공모 의혹)’에서 벗어나니 이번엔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발목을 잡는다. 비영리 진보매체 ‘트루스아웃’이 ‘트럼프 부고기사의 첫 줄이 쓰여졌다’는 칼럼으로 조롱한 탄핵조사의 대상이 됐다. 취임 후 바람 잘 날 없는 악재의 연속이었지만 탄핵위기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다. 민주당도 마냥 신이 나는 것만은 아니다. 탄핵조사 후폭풍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데다, 이를 계기로 2016년 미 대선 당시 우크라이나가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지지한 사실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2016년 미 대선 개입과 관련해 등장하는 인물의 면모는 화려하다. 트럼프 대통령과 2020년 대선 민주당 유력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 클린턴 대선후보, 트럼프 개인변호사인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 폴 매너포트 트럼프 선거대책본부장, 존 포데스타 클린턴 선거대책본부장…. 여기에 알렉산드라 찰루파(우크라이나계 미국인으로 민주당 컨설턴트), 빅토르 핀추크(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 유리 루첸코(전 우크라이나 검찰총장) 등 우크라이나 쪽 인사들도 등장한다.

이름의 중량감으로 보면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국익에 얼마나 중요한 나라인지 짐작이 간다. 한편으로는 도대체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어떤 관계인지, 우크라이나는 왜 미 대선에 개입했는지 등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인들은 그동안 별 관심이 없었던 우크라이나가 자국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현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도 궁금하다.

우크라이나, 힐러리 클린턴 지지 드러나

발단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6년 미 대선이 불과 3개월도 남지 않은 8월 19일(현지시간), 트럼프 캠프 선대본부장 폴 매너포트가 사임하는 일이 벌어졌다. 트럼프로서는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미 유력지 <뉴욕타임스>의 단독보도가 계기였다. <뉴욕타임스>는 그해 8월 14일 우크라이나 국가반부패국(NABU)으로부터 받은 ‘검은 장부’를 토대로 친러시아파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이 이끄는 정당이 매너포트에게 장부에 없는 수백만 달러를 지급했다고 폭로했다. 신문은 다음날 후속보도로 우크라이나 언론인이자 전 의원인 세르히 레첸코가 그 장부를 조사했다고 전했다. 결국 매너포트는 다음날인 8월 19일 선대본부장직에서 물러났다.

트럼프 캠프에는 대악재였지만 클린턴 캠프로서는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트럼프의 선대본부장이 친러시아파인 야누코비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는 곧 트럼프가 러시아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캠프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우크라이나 정부가 선거를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의심할 만했다. 하지만 NABU와 레첸코는 우크라이나의 부패 척결이 목적이지 미 정치에 관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레첸코는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터지기 직전인 지난 9월 21일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도 “매너포트가 한 일을 폭로한 의도는 정의를 위한 열망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로부터 5개월 후. 이번에는 힐러리 클린턴이 2016년 대선 당시 우크라이나의 도움을 받았다는 폭로가 터졌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불과 9일 전인 2017년 1월 11일, 정치전문지 <폴리티코> 보도가 계기였다. 보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정부가 트럼프의 고위 보좌관이 부패에 연루됐음을 보여주는 자료를 퍼뜨리고 선거 후를 대비해 그 사안에 대해 조사하고 있으며, 트럼프와 그의 고문들을 흠집내기 위한 클린턴 후보 측근들의 조사를 돕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폴리티코>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미 대선에 개입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폴리티코>는 트럼프의 선대본부장인 매너포트만 야누코비치와 연루된 것이 아니라 클린턴 캠프의 선대본부장인 존 포데스타도 야누코비치와 함께 작업한 사실도 전했다. 또한 민주당 전국위원회(DNC)의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알렉산드라 찰루파가 미국 주재 우크라이나대사관의 고위관계자와 만나 트럼프가 러시아와 연루돼 있다는 이야기를 계속 강조하기 위해 매너포트 사임을 강요한 사실도 드러났다. 민주당이 당시 집요하게 트럼프의 러시아 연루설을 강조한 이유는 유권자들을 트럼프로부터 이탈시키기 위함이었다.

우크라이나가 미국 대선에 개입한 것은 ‘타국 선거 불개입’이라는 외교 프로토콜에 위배된다. 그럼에도 이 보도는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다. 어차피 클린턴은 패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백악관이 지난 9월 25일 공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지난 7월 25일 통화 녹취록. AFP연합뉴스


우크라이나의 이중 플레이에 빠진 미국

백악관이 지난 9월 25일 공개한 트럼프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지난 7월 25일 통화 녹취록에는 트럼프가 ‘크라우드스트라이크’에 대한 조사를 젤렌스키에게 요청한 부분이 있다. 크라우드스트라이크는 2016년 민주당 전국위원회(DNC)가 러시아 그룹이 어떻게 DNC와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 관련 e메일을 해킹해 비리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에 전달했는지 조사하기 위해 고용한 사이버 안보기업이다. 트럼프가 크라우드스트라이크를 언급한 이유는 크라우드스트라이크가 DNC 서버를 잘못 다뤘다는 소문과 함께 크라우드스트라이크 서버가 우크라이나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젤렌스키가 알길 원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크라우드스트라이크는 성명을 통해 “2016년 DNC 해킹 조사와 관련해 우리는 모든 포렌식 증거와 분석자료를 미 연방수사국(FBI)에 제공했다”고 밝혔다.

중요한 것은 크라우드스트라이크 공동창업자이자 최고기술책임자(CTO)인 드미트리 알페로비치가 반러시아 싱크탱크인 ‘애틀랜틱 카운슬’의 선임연구원이라는 점이다. 애틀랜틱 카운슬은 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인 빅토르 핀추크가 재정후원을 하고 있다. 제강업으로 큰 돈을 번 핀추크는 우크라이나와 유럽연합(EU)의 긴밀한 관계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친서방파 인사다. 클린턴재단의 ‘큰손’이기도 하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클린턴이 국무장관으로 재직한 기간이 포함된 2009~2013년 클린턴재단은 빅토르 핀추크 재단으로부터 860만 달러를 기부받았다. 핀추크는 대선 후 트럼프재단에도 기부를 했는데,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관계 강화가 목적이라고 밝혔다. 애틀랜틱 카운슬은 2013년 클린턴에게 ‘국제리더십 공로상’을 수여했다. 크라우드스트라이크와 애틀랜틱 카운슬, 빅토르 핀추크는 우크라이나가 클린턴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로 읽힐 수 있다.

트럼프는 지난 7월 25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통화에서 2020년 대선의 민주당 유력주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 측을 조사해달라고 압박한 의혹을 받고 있다. 반대급부로 제시한 것이 우크라이나에 FGM-148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 판매 보장 약속이다. 그 약속은 지난 10월 3일 미 정부와 의회가 우크라이나에 재블린 미사일 150기와 발사대 10기(약 3920만 달러) 판매를 승인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실제로 미국은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한 후 우크라이나에 군사원조를 해왔다. 미국은 지난해 5월에도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 210대와 발사기 37대(4700만 달러 상당)를 우크라이나에 팔았다. 재블린 미사일은 미 방산업체 레이시온이 개발해 2003년 이라크 침공 때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된 것으로, 1기당 가격은 8만 달러다.

클린턴이 2016년 대선 당시 우크라이나의 도움을 받은 것이나,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뒤 우크라이나에 도움을 주고받은 것 모두 미국의 국익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활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9월 25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오바마의 ‘우크라이나 사태’ 개입이 시작

현재 진행되는 모든 사태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3년 말~2014년 초 일어난 ‘우크라이나 사태’ 때 미국이 적극 개입한 데서 비롯됐다. 2013년 11월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EU와의 경제협력과 지원에 관한 협상을 중단하며 친러시아 정책을 선택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유혈사태로 번졌고, 야누코비치는 2014년 2월 22일 대통령직에서 쫓겨났다. 러시아는 2014년 3월 크림반도를 합병하는 조치를 취해 우크라이나와 서방을 자극했다. 미국과 서방의 지원을 받은 페트로 포로셴코가 그해 6월 대통령이 되면서 우크라이나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게 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서방 간의 전장이 된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원인을 두고는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팽창,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이해와 가치의 충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국내정치적 지지 확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의 군사적 관계 등 다양한 분석(강정일 고려대 정치외교학 박사·한국지정학연구소 연구위원)이 나온다. 한편에서는 미국의 우크라이나 정권교체 공작의 결과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오바마 행정부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은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 오바마가 푸틴과의 협력을 주저하는 틈을 타 두 사람의 협력관계를 완전히 깰 필요가 있었고, 그 기회가 우크라이나 사태였다는 것이 요점이다.

미국만 우크라이나를 이용한 것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또한 미국을 이용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크라이나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불가피한 처세술의 결과다. <뉴욕타임스> 9월 27일 보도를 보면 우크라이나는 예로부터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 끼여 생존을 위해 외부세력을 활용해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해왔다. 이 때문에 앞서 언급한 미국의 유력 인사들이 줄줄이 엮인 것이다. 하버드대 역사학자 세르히 플로키는 <뉴욕타임스>에 우크라이나는 1991년 12월 옛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러시아와 서방 간 전장이 돼 왔으며 “영웅과 악당 모두에게 매혹적인 장소로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는 2차 세계대전 때 카사블랑카나 냉전시대 때 빈이나 베를린처럼 21세기 음모의 소굴로 자리잡았다. 우크라이나 가톨릭대 철학교수 예브헨 힐보비츠키는 “우크라이나는 현재 새로운 베를린 장벽이 들어선 나라”라면서 “일부는 뇌물을 바쳐서라도 서방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나라”라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우크라이나는 권력 브로커를 통해 내부투쟁을 위해 외국의 도움을 구하는 나라가 됐다. 우크라이나 온라인 매체 ‘우크라이나 월드’의 볼로디미르 예르몰렌코 편집장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항상 강한 쪽과 손을 잡으려 노력했다”고 했다. 예브헨 마흐다 세계정책연구소 책임자는 폴 매너포트 같은 사람을 고용하는 것을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를 사는 것으로 여긴다면서 “많은 우크라이나 정치인은 서방의 유력인사에게 돈을 주면 자신의 죄를 씻는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외국 보호자나 후견인을 추구하는 것은 정치적 성향이 무엇이든 간에 우크라이나 정치 및 기업 엘리트에게 흔한 모습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지적했다. 실제로 2014년 2월 서방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된 포로셴코는 오바마 행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2016년 대선에서 클린턴 후보를 선호했음에도 트럼프의 구애를 위해 엄청난 투자를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트럼프나 바이든에게 보험을 들 수밖에 없었을 터다.

2016년 미 대선 때 우크라이나의 개입이나, 트럼프를 탄핵위기로 몰아넣은 ‘우크라이나 스캔들’을 보면 역사는 비극이든 희극이든 반복된다는 걸 실감한다. 과거 우크라이나 대선은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이었는데, 미국 대선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리전이 됐으니 말이다. 행여 클린턴과 트럼프는 세계 최강자국의 운명이 우크라이나 손에 놓여지는 상황이 오리라는 걸 상상조차 했을까.

조찬제 선임기자 helpcho65@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