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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여적

[여적] 북극항로의 '피폭'(210524)

1990년 미·소 간 냉전 종식이 가져온 선물이 있다. 북극항로(polar route)의 개척이다. 냉전 시절 서울에서 미국 동부로 가는 가장 빠른 항로는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경유하는 우회 항로였다. 옛 소련이 자국 영공 통과를 금지해서다. 1998년 7월7일 뉴욕발 여객기가 논스톱으로 북극 극지방과 러시아 상공을 거쳐 홍콩에 착륙한 이후 본격적인 북극항로 시대가 열렸다.

북극항로는 항공사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비행시간 단축과 유류비 절감 효과를 톡톡히 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공 승무원에겐 공포스러운 길이다. 우주방사선 피폭 탓이다. 우주방사선은 우주에서 지구로 쏟아지는 높은 에너지를 가진 각종 입자와 방사선을 말한다. 피폭선량은 고도가 높을수록, 노출시간이 길수록 증가한다. 10㎞ 이상 상공에서 장시간 비행하는 승무원은 피폭될 확률이 높다. 특히 북극은 지구에서 우주방사선이 가장 강하다. 적도보다도 2~5배가량 높다. 지구 자기장이 방사선을 극쪽으로 빨아당기기 때문이다.

 

1년에 인간이 자연계로부터 받는 피폭선량은 평균 2.4m㏜(밀리시버트)다. ㏜는 방사선의 인체 위험도를 고려한 유효선량 단위다. 한국에서 미 동부로 비행하면 0.1m㏜ 정도 피폭된다. 어쩌다 여행하는 일반인들에겐 큰 문제가 아니지만 항공 승무원은 얘기가 다르다. 이들의 피폭선량은 원전 종사자보다도 최대 10배 높다. 일반인보다 유방암, 급성골수백혈병, 전립선암 등에 걸릴 확률도 높다. 현재 항공 승무원의 피폭 방사선량 안전기준은 ‘연간 50m㏜를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5년간 100m㏜ 이하’다.

 

북극항로를 자주 다니다 백혈병으로 숨진 대한항공 여성 승무원 A씨가 신청한 산재가 지난 17일 받아들여졌다. 항공 승무원의 우주방사선 피폭이 산재로 인정된 첫 사례다. A씨의 피폭선량이 현 규정보다 낮은데도 당국이 산재로 인정한 것은 획기적이다. 2명의 승무원이 같은 질병으로 산재를 신청해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한다. 24일부터 정부는 항공 승무원의 피폭 방사선량 안전기준을 서구와 같은 연간 6m㏜로 강화한다. 임신한 여성 승무원은 2m㏜에서 1m㏜로 낮아진다. 만시지탄이지만, 항공 승무원의 안전을 우선하는 전기로 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