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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여적

[여적] 투투 대주교의 진실화해위(211228)

“이제라도 용기를 내어 진실을 고백한다면 오히려 용서와 화해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에서 한 말이다. 문 대통령 메시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진실화해위원회의 정신을 빌려온 것이다. ‘가해자의 진실 고백-용서-화해’ 과정은 남아공 진실화해위가 추진한 ‘보복 없는 과거사 청산’의 전형이다. 40년이 지나도록 규명되지 않는 5·18 발포 명령자와 계엄군이 자행한 숨겨진 민간인 학살 등을 찾기 위해서는 처벌 그 자체보다 고백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1994년 오랜 투옥과 투쟁 끝에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흑인차별정책) 청산과 사회통합을 위한 첫 작업으로 진실화해위를 만든다. 이 위원회는 과거사 청산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진해 사실을 털어놓는 가해자에게는 처벌 대신 사면 혜택을 주는 것이 핵심이다. 단죄를 뛰어넘은 용서를 통한 화해 추구는 ‘나치 전범 단죄=정의 실현’이라는 뉘른베르크 재판의 정신과 전혀 다른 접근법이다. 1996~2003년 활동한 진실화해위를 통해 사면받은 이는 7000여명의 신청자 중 1500명이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남아공 정부는 진실화해위 권고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진실화해위는 과거 청산과 국민통합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미완으로 남았다. 남아공 모델은 이후 여러 나라로 퍼졌다. 2005년 출범한 우리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도 이 모델을 차용했다. 일제강점기와 권위주의 통치기에 일어난 인권침해 등 과거 국가폭력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출범 후 5년여간 활동했던 1기에 이어 2기 위원회가 지난해 12월부터 활동 중이다.

남아공 진실화해위를 이끌었던 데즈먼드 투투 명예대주교가 26일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투투는 ‘회복적 정의’라는 개념을 진실화해위에 투영시켰다. 처벌보다는 치유와 조화, 화해로 불균형을 시정하고 깨진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처벌과 보복에 갇혀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화해와 통합을 향한 투투의 긴 여정은 끝났다. 나머지 진실규명은 남은 자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