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가 없다면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친구 하나 없는 국가로 남게 될 것이다.”(1월28일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30년 이상 평화를 지켜왔고 앞으로도 이런 관계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1월30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이집트 사태를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위기감을 반영하는 말들이다. 국제사회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된 이집트 사태에 가장 노심초사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이스라엘이다. 1981년 집권한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83)은 지난 30년간 적대적인 아랍국가로 둘러싸인 중동의 지정학적 환경에서 이스라엘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무바라크가 이번 사태로 9월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는 등 영향력을 잃게 됨에 따라 이집트 민주화 시위는 이스라엘에 ‘발등의 불’이 됐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환경은 지금도 비우호적이다. 북쪽 레바논에는 적대적인 무장정파 헤즈볼라가 있다. 그 뒤엔 지난해 5월 가자 구호선 공격사건으로 관계가 소원해진 터키가 있다. 동쪽엔 하마스의 팔레스타인이 버티고 있다. 시리아와 이란이 그 뒤를 떠받치고 있다. 한마디로 사면초가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협정이 파기될 경우 그동안 안전지대였던 남서쪽에서 이집트와 상대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팔레스타인과의 최대 현안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지구에 대해 이집트가 적극적으로 나올 경우 이스라엘의 입지는 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미국 우드로윌슨센터의 중동전문가 로저 하디는 BBC 웹사이트 기고문에서 “이집트 사태는 약화된 중동평화 과정에 큰 타격이 될 수 있다”면서 “이집트의 정권 변화는 이스라엘 지도자에겐 경종이 되고 국민들을 정신적으로 더 포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스라엘 독립 이후 아랍국가의 맹주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79년 평화협정을 기준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가 ‘전쟁의 시기’였다면 후반부는 평화, 엄밀히 말하면 ‘긴장 속의 평화(cold peace)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 그 전반부를 책임진 인물은 아랍 민족주의를 주창한 가말 압델 나세르였다. 나세르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3차례의 전쟁을 일으켰다. 나세르의 후임인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73년 10월 4차 중동전쟁을 일으켰지만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의 길을 열었다. 그 결과는 78년 9월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나타났다. 역사적인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기초해 79년 3월26일 미국 백악관에서 체결됐다. 주인공은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네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었다. 이로써 이집트는 아랍국가 가운데 최초로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는 국가가 됐다. 이집트는 반대급부로 이스라엘로부터 67년 3차 중동전쟁으로 빼앗긴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고 미국으로부터 매년 20억달러의 원조를 받게 됐지만 다른 아랍국가로부터는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평화협정의 당사자인 사다트는 81년 10월6일 암살되는 비운을 맞았다. 사다트의 장례식엔 미국의 전직 대통령 3명을 비롯해 서방에서 많은 조문단이 참석했지만 아랍국가 지도자는 어느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후원국이었던 소련은 조문단조차 보내지 않는 등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반면 이스라엘은 평화협정을 통해 아랍 최대 국가와 손을 맞잡으면서 아랍지역에서 확실한 거점을 마련했다. 무엇보다도 서쪽 국경에 대해 30년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또 오랜 이스라엘-아랍권의 갈등을 통제 가능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로 축소시키는 전략적인 성과도 거뒀다. 국방예산 면에서도 이스라엘은 큰 특혜를 누렸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각국 군비자료에 따르면 평화협정 이전 이스라엘 국방예산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컸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국방예산은 이집트가 군사적 위협이 되지 않음에 따라 GDP의 7%(2008년)로 크게 줄어들었다.
사다트의 뒤를 이은 무바라크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전임자의 노선을 이어갔다. 하지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무바라크는 사다트가 아랍국가 대통령으로서 이스라엘을 처음 방문해 의회(크네셋)에서 연설한 것과 달리 집권 30년 동안 8명의 이스라엘 총리를 상대했지만 단 한차례만 이스라엘을 찾았다. 95년 11월 이스라엘 급진파에 피살된 이츠하크 라빈 당시 총리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서다. 반면 네타냐후 총리는 최근 5개월 동안 두 차례 찾는 등 이스라엘 측의 이집트 방문은 빈번했다. 그럼에도 무바라크는 82년 레바논 전쟁, 87년과 2000년 팔레스타인의 무장봉기(인디파다), 2008년 말 가자 침공 때도 평화협정을 준수했다.
특히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에 대항해 투쟁해온 야세르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마무드 압바스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를 지지하는 등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 과정에서 이스라엘 편을 들었다. 2006년 하마스가 가자지구 총선에서 승리하자 무바라크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마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최대 야권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이 ‘하마스 효과’에 자극을 받을 것을 우려해서다. 2007년 6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에 발맞춰 라파 국경검문소를 폐쇄, 가자지구의 150만 팔레스타인인을 경제적 고통 속에 빠뜨렸다. 이스라엘의 봉쇄조치 속에서 가자 주민들의 생명선 역할을 해온 국경터널을 폐쇄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바라크는 이스라엘이 필요한 천연가스의 약 40%를 공급해주고 있다.
이집트 사태로 무바라크는 기로에 서게 됐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향후 이집트 상황에 대해 다양한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지만 이스라엘로서는 관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분명한 것은 무바라크의 대선 불출마 선언에 따라 ‘무바라크 없는 상황’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는 이집트와의 관계에서 독립변수였던 이스라엘이 종속변수가 됐으며, 이집트 사태가 어떻게 귀결되더라도 이스라엘로서는 무바라크 정권 시절의 특혜를 더 이상 누리지 못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의 운명은 어떤 세력이 이집트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평화협정의 존폐 여부를 진단하는 전문가들의 시각은 엇갈린다. 이스라엘 군사전문가인 아모스 하렐은 영국 일간 가디언에 “이집트 정권 붕괴는 이스라엘에 엄청나게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것”이라면서 “결국 이스라엘에 미국의 지원에 이어 가장 큰 전략적 자산인 이집트와 맺은 협정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미셸 듄 연구원은 워싱턴포스트에서 “비폭력적인 정권 이행이 이뤄진다면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은 존중될 것으로 본다”면서 “이집트 국민들은 전쟁상태로 되돌아가길 원치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집트 사태가 이스라엘 내 강경파를 자극하는 동시에 이집트 내부에서 가자지구에 대한 정책변화를 요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스라엘 퇴역장군들이 만든 싱크탱크인 국가안보연구소의 오데드 에란은 “국방 관련 기관들이 더 많은 예산을 요구할 것이 틀림없다”고 시사주간 타임 인터넷판 기고문에서 전망했다. 미셸 듄은 “이집트의 새 정부는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좀 더 친밀하게 대할 것”이라면서도 “시나이 반도 지역으로의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문제와 폭력행위 준동 가능성 탓에 가자 주민들에게 쉽게 문호를 개방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편으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함께 미국의 중동정책의 양대 축이긴 하지만 미국의 중동 최대의 우방국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미국 바드대학의 월터 러셀 미드는 폴리티코에 기고한 글에서 “이집트에 과격 정부가 들어서서 평화협정을 무효화하거나 하마스의 폭력행위와 다른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협할 경우 미국은 이스라엘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30년 이상 평화를 지켜왔고 앞으로도 이런 관계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1월30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이집트 사태를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위기감을 반영하는 말들이다. 국제사회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된 이집트 사태에 가장 노심초사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이스라엘이다. 1981년 집권한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83)은 지난 30년간 적대적인 아랍국가로 둘러싸인 중동의 지정학적 환경에서 이스라엘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무바라크가 이번 사태로 9월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는 등 영향력을 잃게 됨에 따라 이집트 민주화 시위는 이스라엘에 ‘발등의 불’이 됐다.
“친이스라엘 대통령 물러나라” 이집트 국민들이 지난 4일 수도 카이로 중심부 타흐리르 광장에서 열린 반정부시위 도중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 얼굴 위에 유대인과 유대교를 상징하는 ‘다윗의 별’을 그려놓은 포스터를 흔들고 있다. 무바라크가 친이스라엘 정책을 펴온 데 대한 이집트 국민들의 반발 심리를 보여준다. 카이로 | AP연합뉴스
무바라크의 퇴진과 민주화가 이집트의 현안이라면 현상 유지야말로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바라는 현상 유지의 핵심은 79년 3월 체결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체제의 유지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은 이집트에 과격 이슬람 또는 반 이스라엘 정권이 들어선 뒤 평화협정을 파기하는 것이다. 평화협정은 미국의 지원과 함께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을 지탱해준 안전판이었다. 협정의 파기는 48년 5월 독립선언 이후 4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형성해온 ‘불안한 평화’가 깨질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스라엘로서는 79년 이전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활적 이해가 걸린 문제다.이스라엘을 둘러싼 환경은 지금도 비우호적이다. 북쪽 레바논에는 적대적인 무장정파 헤즈볼라가 있다. 그 뒤엔 지난해 5월 가자 구호선 공격사건으로 관계가 소원해진 터키가 있다. 동쪽엔 하마스의 팔레스타인이 버티고 있다. 시리아와 이란이 그 뒤를 떠받치고 있다. 한마디로 사면초가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협정이 파기될 경우 그동안 안전지대였던 남서쪽에서 이집트와 상대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팔레스타인과의 최대 현안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지구에 대해 이집트가 적극적으로 나올 경우 이스라엘의 입지는 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미국 우드로윌슨센터의 중동전문가 로저 하디는 BBC 웹사이트 기고문에서 “이집트 사태는 약화된 중동평화 과정에 큰 타격이 될 수 있다”면서 “이집트의 정권 변화는 이스라엘 지도자에겐 경종이 되고 국민들을 정신적으로 더 포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스라엘 독립 이후 아랍국가의 맹주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79년 평화협정을 기준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가 ‘전쟁의 시기’였다면 후반부는 평화, 엄밀히 말하면 ‘긴장 속의 평화(cold peace)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 그 전반부를 책임진 인물은 아랍 민족주의를 주창한 가말 압델 나세르였다. 나세르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3차례의 전쟁을 일으켰다. 나세르의 후임인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73년 10월 4차 중동전쟁을 일으켰지만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의 길을 열었다. 그 결과는 78년 9월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나타났다. 역사적인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기초해 79년 3월26일 미국 백악관에서 체결됐다. 주인공은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네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었다. 이로써 이집트는 아랍국가 가운데 최초로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는 국가가 됐다. 이집트는 반대급부로 이스라엘로부터 67년 3차 중동전쟁으로 빼앗긴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고 미국으로부터 매년 20억달러의 원조를 받게 됐지만 다른 아랍국가로부터는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평화협정의 당사자인 사다트는 81년 10월6일 암살되는 비운을 맞았다. 사다트의 장례식엔 미국의 전직 대통령 3명을 비롯해 서방에서 많은 조문단이 참석했지만 아랍국가 지도자는 어느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후원국이었던 소련은 조문단조차 보내지 않는 등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반면 이스라엘은 평화협정을 통해 아랍 최대 국가와 손을 맞잡으면서 아랍지역에서 확실한 거점을 마련했다. 무엇보다도 서쪽 국경에 대해 30년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또 오랜 이스라엘-아랍권의 갈등을 통제 가능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로 축소시키는 전략적인 성과도 거뒀다. 국방예산 면에서도 이스라엘은 큰 특혜를 누렸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각국 군비자료에 따르면 평화협정 이전 이스라엘 국방예산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컸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국방예산은 이집트가 군사적 위협이 되지 않음에 따라 GDP의 7%(2008년)로 크게 줄어들었다.
사다트의 뒤를 이은 무바라크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전임자의 노선을 이어갔다. 하지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무바라크는 사다트가 아랍국가 대통령으로서 이스라엘을 처음 방문해 의회(크네셋)에서 연설한 것과 달리 집권 30년 동안 8명의 이스라엘 총리를 상대했지만 단 한차례만 이스라엘을 찾았다. 95년 11월 이스라엘 급진파에 피살된 이츠하크 라빈 당시 총리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서다. 반면 네타냐후 총리는 최근 5개월 동안 두 차례 찾는 등 이스라엘 측의 이집트 방문은 빈번했다. 그럼에도 무바라크는 82년 레바논 전쟁, 87년과 2000년 팔레스타인의 무장봉기(인디파다), 2008년 말 가자 침공 때도 평화협정을 준수했다.
특히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에 대항해 투쟁해온 야세르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마무드 압바스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를 지지하는 등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 과정에서 이스라엘 편을 들었다. 2006년 하마스가 가자지구 총선에서 승리하자 무바라크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마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최대 야권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이 ‘하마스 효과’에 자극을 받을 것을 우려해서다. 2007년 6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에 발맞춰 라파 국경검문소를 폐쇄, 가자지구의 150만 팔레스타인인을 경제적 고통 속에 빠뜨렸다. 이스라엘의 봉쇄조치 속에서 가자 주민들의 생명선 역할을 해온 국경터널을 폐쇄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바라크는 이스라엘이 필요한 천연가스의 약 40%를 공급해주고 있다.
이집트 사태로 무바라크는 기로에 서게 됐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향후 이집트 상황에 대해 다양한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지만 이스라엘로서는 관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분명한 것은 무바라크의 대선 불출마 선언에 따라 ‘무바라크 없는 상황’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는 이집트와의 관계에서 독립변수였던 이스라엘이 종속변수가 됐으며, 이집트 사태가 어떻게 귀결되더라도 이스라엘로서는 무바라크 정권 시절의 특혜를 더 이상 누리지 못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의 운명은 어떤 세력이 이집트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평화협정의 존폐 여부를 진단하는 전문가들의 시각은 엇갈린다. 이스라엘 군사전문가인 아모스 하렐은 영국 일간 가디언에 “이집트 정권 붕괴는 이스라엘에 엄청나게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것”이라면서 “결국 이스라엘에 미국의 지원에 이어 가장 큰 전략적 자산인 이집트와 맺은 협정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미셸 듄 연구원은 워싱턴포스트에서 “비폭력적인 정권 이행이 이뤄진다면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은 존중될 것으로 본다”면서 “이집트 국민들은 전쟁상태로 되돌아가길 원치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집트 사태가 이스라엘 내 강경파를 자극하는 동시에 이집트 내부에서 가자지구에 대한 정책변화를 요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스라엘 퇴역장군들이 만든 싱크탱크인 국가안보연구소의 오데드 에란은 “국방 관련 기관들이 더 많은 예산을 요구할 것이 틀림없다”고 시사주간 타임 인터넷판 기고문에서 전망했다. 미셸 듄은 “이집트의 새 정부는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좀 더 친밀하게 대할 것”이라면서도 “시나이 반도 지역으로의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문제와 폭력행위 준동 가능성 탓에 가자 주민들에게 쉽게 문호를 개방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편으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함께 미국의 중동정책의 양대 축이긴 하지만 미국의 중동 최대의 우방국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미국 바드대학의 월터 러셀 미드는 폴리티코에 기고한 글에서 “이집트에 과격 정부가 들어서서 평화협정을 무효화하거나 하마스의 폭력행위와 다른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협할 경우 미국은 이스라엘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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