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미국에선 ‘고문 메모’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고문 메모란 조지 W 부시 전 행정부 시절 미 중앙정보국이 물고문 등 테러 용의자들에게 ‘가혹한 신문’을 하도록 법적 근거를 담은 것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달 중순 공개하면서 최고의 정치 쟁점으로 떠올랐다. 오바마는 작성자를 조사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벌어지는 양상은 그의 손을 떠난 모습이다. 부시 전 행정부의 반발에 이어 메모 작성에 참여한 변호사 3명에 대한 법적 책임 공방이 일었다. 급기야 미 행정부 내 서열 3위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마저 ‘진실게임’에 휘말리면서 파장이 번지고 있다.
고문 메모 논란은 국가안보, 정치 공세 그리고 정부의 거짓말을 생각하게 한다. 딕 체니 전 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을 또 다른 테러 공격에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고 반발했다. 오바마 측의 정치 공세라는 투다. 민주당 지지자도 오바마의 조사 불가 방침에 불만이다. 그러나 논란의 본질은 고문이 반 인권 행위라는 점이다. 전시든, 테러리스트든 고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국제적십자위원회가 관타나모 수용소의 테러 용의자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어떤 이는 11일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어떤 이는 183차례나 물고문을 당했다. 그런데도 부시 행정부는 국가안보를 위한 수단이라고 포장한다. 부시는 “우리는 고문을 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거짓말한다.
오바마 행정부는 어떤가. 지난달 중순 파키스탄 내 탈레반이 수도 이슬라마바드 100㎞ 근처까지 영향권을 넓히자 미국은 파키스탄 핵이 그들의 손에 넘어갈까 우려했다. 테러리스트가 핵무기를 가지는 상황.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레퍼토리 아닌가. 파키스탄을 아프간 전략 수행의 핵심기지로 활용하려는 오바마 행정부로서는 그럴 법하다. 그러나 주간 이코노미스트(5월2일 발간)는 서방 외교관들의 말을 인용해 이를 유언비어로 치부했다.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미 중부군 사령관은 며칠 뒤(5월10일) 파키스탄 핵은 안전하다고 말했다. 갑자기 핵 위협이 사라진 것이다.
정부가 국민을 속이는 일은 현실 정치에서 비일비재하다. “정치자금 한 푼도 받지 않았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도 거짓말로 드러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4대강 개발은 ‘대운하 사업’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터이다. 통치자들이 이럴진대 입만 열면 거짓말하는 장관들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 거짓말이 정치 행위의 하나로 당연히 여겨지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묵인해야 하는가. 물론 아니다.
“정부는 거짓말한다”고 대놓고 말한 미국 언론인이 있다. ‘IF 스톤즈 위클리’라는 1인 신문을 만들어 매카시즘과 베트남전 등 미 행정부의 비리를 캐온 이시도르 F 스톤(1907~89)이다. 그는 언론인 지망생에게 두 단어만 기억하라고 했다. 바로 ‘정부는 거짓말한다(Governments Lie)’다. 국민을 속이는 정부를 감시하는 것이 언론인의 사명이란 뜻일 게다. 언론의 감시가 누그러질 때 국민들의 세금은 새나가고, 삶은 피폐해진다. 사안을 바라보는 데 언론 간의 시각차는 있을 수 있지만, 정부의 거짓말에 대한 대응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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