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무기가 쓴 기사/월드프리즘

[월드 프리즘3]“그리스 총선서 국민이 ‘1%’를 이겼다”(2015.02.10ㅣ주간경향 1113)

1월 25일 치러진 그리스 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 ‘시리자’(Syriza)가 압승한 일은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냉전 시작 후 유럽에서 급진좌파 정권이 처음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시리자 승리의 의미와 시리자를 이끌어갈 알렉시스 치프라스 대표의 향후 행보를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다단하다. 좌파와 진보 진영은 지난 30여년을 지배해온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승리이자 새로운 대안 모델을 모색할 기회로 보면서도 시리자의 행보에 대해서는 마냥 낙관만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우파는 유럽연합(EU) 균열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우려하면서도 결과에 대해서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과연 시리자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

그리스 총선에서 승리한 급진좌파연합 ‘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대표. 그는 “그리스 국민들의 희망이 역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 아테네 AP연합뉴스


‘유럽 분열의 신호탄’ 우파 언론 선전전
그리스 총선은 ‘그리스 국민과 상위 1%’ 간의 대결(99% 대 1%)이었다는 시각이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거부하는 좌파와 진보 진영의 논리다. 이들은 총선 전후 시리자를 과격하고, 공산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포퓰리스트이자 좌파 정당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부각시키며 시리자 승리에 거부감을 보여온 우파와 주류 언론들의 행태를 선전전으로 치부한다. 또 국제통화기금(IMF)·유럽중앙은행(ECB)·EU 등 그리스 채권단(트로이카)의 수혜자는 시장과 투자가, 채권자들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구제금융을 받고도 비참한 현실에 처한 그리스 국민들에게 이번 총선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싸움’일 뿐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그리스 구제금융으로 구제된 이들은 채권단인 트로이카밖에 없다”고 주장해 이 같은 논리에 힘을 실었다. 크루그먼은 총선 다음날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에서 “2014년까지 그리스는 실업률이 28%, 특히 청년실업률은 약 60%에 이르는 등 전방위적인 침체를 겪었다. 회복세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리자는 바로 이 틈바구니를 파고들었다. 치프라스는 집권하면 채권단과 채무조정 재협상을 해 채권단이 구제금융 조건으로 요구한 긴축정책을 폐기하는 대신 임금 및 연금 인상·해고 중단·민영화 동결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강조했고, 이 전략은 국민들에게 먹혀들었다.

1%는 총선 막판에 반격을 시도했다. ECB가 총선 사흘 전인 1월 22일 1조1000억 유로 규모의 양적완화 조치를 발표한 것이다. 긴축과 재정건전화 정책이 사실상 실패했음을 시인한 것이지만 압승이 예상되는 시리자의 기세를 꺾을 의도도 담겨 있었다. 시리자는 국민들의 짐을 덜 수 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드러냈지만 헛된 꿈이었음이 이내 드러났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구제금융의 대가로 긴축을 받아들일 경우에만 지원한다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시리자의 승리가 유럽의 분열을 낳을 수 있다는 우파와 주류 언론들의 우려는 치프라스가 밝힌 구제금융 재협상 위협에서 비롯됐다. 그리스의 재협상 요구를 받아주면 다른 구제금융 대상국들에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겨 유럽의 균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정작 치프라스는 구제금융 재협상은 EU 규율 안에서 이뤄질 것이라며 그리스의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탈퇴를 뜻하는 ‘그렉시트’(Grexit)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그리스 국기를 흔들며 시리자의 총선 승리를 축하하고 있는 국민들. | 아테네 AP연합뉴스


유럽 분열 가능성은 그동안 많은 전문가들이 제기해온 시나리오의 하나였다. 존 페퍼 미국 외교정책포커스(FPIF) 소장은 1월 27일 톰디스패치에 기고한 글에서 “유럽 대륙에 또 다른 전쟁은 없겠지만 유럽은 유로존의 해체나 지역통합의 약화와 같은 잠재적인 붕괴에 직면해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난해 7월 헝가리에서 EU 균열의 정치적 파열음이 터져나왔다.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반자유주의 국가’로 헝가리를 개조하겠다고 밝힌 것이 계기였다. 페퍼 FPIF 소장은 “서방국가 모델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러시아나 중국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며 “메르켈의 길에 반기를 들고 푸틴의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시리자 압승 후 ‘독일 주도의 긴축정책을 깰 수 있다’는, 좌우를 막론한 EU 회의주의 포퓰리스트 정당들의 자신감 표출도 유럽 분열 우려를 심화시켰다. 그리스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스페인의 좌파 정당 포데모스의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대표는 “그리스 국민이 안토니오 사마라스 총리에게 패배를 안겨줌으로써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대표’를 권력에서 끌어내렸다”고 말했다. 포데모스는 지난해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창당 4개월 만에 5석을 얻으며 급부상했다. 현지 신문 엘파이스의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 1위를 기록해 오는 12월 총선에서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영국의 EU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Brexit)를 노골적으로 공언해온 극우 영국독립당의 나이젤 패라지 대표도 이번 총선 결과를 “유로존 실험에 고통받아온 수백만명의 그리스 국민들이 도움을 호소하는 간절한 절규”라면서 “ECB가 방관자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을 만큼 힘이 빠진 가운데 그리스와 메르켈 독일 총리 사이에 이전과 전혀 다른 게임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시리자가 친러시아 행보를 보여온 데 대한 견제 움직임도 눈에 띈다. 치프라스는 총선 다음날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파이낸셜타임스(1월 28일)는 이를 두고 “치프라스가 EU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고 표현했다. 치프라스의 태도에 대해서는 다가올 채권단과의 재협상을 위한 도박이라는 시각과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려는 사례로 보는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고 신문은 지적했다.

‘시리자는 좌파의 탈을 쓴 우파’ 시각도
전문가들은 그리스의 채무상환 기한을 연장해주는 쪽으로 합의점을 찾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여기에는 유럽의 분열은 막아야 한다는 바람이 깔려 있다. 미국 칼럼니스트 월리엄 파프는 1월 27일 웹사이트에 올린 글에서 “앞으로 몇 달 사이에 EU가 직면한 가장 흥미로운 질문은 채권단이 합의를 이끌어낼 것인가 여부다. 합의를 도출하지 못할 경우 EU는 위기에 빠져 ‘그렉시트’나 ‘브렉시트’가 자리를 잡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페퍼 FPIF 소장은 “‘다양성 속의 통일’은 매력적인 개념이지만 하나의 EU로 남기 위해서는 꾸며낸 수사나 좋은 의도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면서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극단주의, 사회적 불관용에 대한 더 나은 처방이 없다면 반대자들이 유럽 통합의 되감기 단추를 누를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시리자가 연정 파트너로 우파인 그리스독립당을 선택한 데 대한 좌파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과거 좌우 동거 연정들이 한계를 드러내온 탓이다. 세계사회주의자웹사이트(WSWS)는 1월 27일 “시리자는 자본가들을 위한 정당”이라고 규정했다. ‘희망’과 ‘변화’를 약속했다가 긴축과 전쟁의 길로 들어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민주당 정권처럼 머잖아 대중들의 열망을 배신할 것이 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리자의 ‘우파 본색’은 치프라스가 연정 파트너를 선택하기 이전부터 드러났다. 그는 그리스의 힘 있는 자본가 계급과 특권이 있는 상위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신호를 보내며 자신의 집권에 대한 유럽인들의 우려의 시선을 누그러뜨려 왔다. 치프라스의 그림자내각의 발전장관인 게오르게 스타타키스는 총선 전 파이낸셜타임스에 “기업가들이 불평해온 관료주의 문제를 없애 기업가들의 삶을 쉽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도 이를 예견하듯 총선 다음날인 26일자 사설에서 “시리자의 승리는 그리스 자본주의와 EU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썼다. WSWS는 “치프라스는 지난해 미국 방문 때 미국 자본가의 핵심 이익에 완전히 일치하는 대외정책을 수행할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