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무기가 쓴 기사/월드프리즘

[월드 프리즘4]‘세렝게티 전략’ 앞세운 ‘기후변화의 적들’(2015.02.17ㅣ주간경향 1114호)

“많은 이들처럼 현재의 공적 담론 상황에 좌절감을 느낀다. 자신들의 단기적 이해관계에 따라 현재의 담론을 장악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미국 국립대기연구센터 존 파설로 박사)

“난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느낀다.…왜 많은 정치인과 기업가, 대중들은 지구 대기에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는 것이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지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어떤 이들이 연구비를 더 받기 위한 전 지구적 음모라고 나를 비난하는 데 놀랄 따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데 분노하고 절망한다.”(호주국립대 헬런 맥그리거 교수)

“나를 압도하는 감정은 분노다. 그 분노는 무시 때문이 아니라 미래 세대가 어떤 대가를 치르든 괘념하지 않는 부당이득 추구와 탐욕에 기인한다.… 생물학자로서 날마다 인간에 의한 기후파괴가 현재 진행 중인 인류 대멸종의 주요인이라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보고 있다.”(호주 애들레이드대 코레티 브래드쇼 교수)

“인류 구성원으로서, 특히 부모로서 나는 우리가 지구에 피해를 주고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엉망인 상태를 남겨주고 싶지 않고, 다른 아이들에게 뒷설거지를 하라고 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지금 그들에게 놀라울 정도의 문제를 만들고 있는데, 그것이 걱정이다.”(영국 엑스터대 피터 콕스 교수)

전 세계 기후과학자 35명이 연구하면서 느낀 점을 올린 글 모음. 이들은 ‘인간에 의한 기후파괴’ 증거들이 널려 있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 대한 좌절과 분노, 우려를 드러냈다. | 조 더건 블로그 캡처


과학 현안을 대중들에게 쉽게 설명하는 ‘과학해설가’ 조 더건은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 ‘어떻게 느끼나요’(Is this how you feel?)를 통해 기후변화 연구자들에게 연구하면서 느낀 점을 올려달라고 요청했다. 지난해 중순부터 이달 초까지 전 세계 기후변화 연구자 35명이 답해왔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은 위의 사례처럼 좌절과 분노, 우려를 쏟아냈다. 요약하면 기후과학자들을 힘겹게 만드는 것은 ‘인간에 의한 기후파괴’(Anthropogenic Climate Disruption)를 보여주는 과학적 증거들이 도처에 널려 있음에도 이를 애써 외면하려는 세력들과 이들이 주도하는 기후변화 담론 구조였다. 이들의 생각이 현재 기후변화를 둘러싼 논쟁에서 전체를 대변하는 입장은 아닐지 몰라도 논쟁의 실체를 어느 정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 증거 애써 외면하는 세력들
기후변화가 인류에게 끼칠 위협에 대한 경각심과 인간이 기후 파괴의 주요 원인제공자라는 주장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어느 때보다 공감받아 왔다. 여기에 기여한 대표적 인물이 미국 대통령 후보에서 환경운동가로 변모한 앨 고어다. 그는 2006년 지구온난화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불편한 진실’을 통해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 공로로 2007년에 지구온난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 유엔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특히 유엔은 2013년 기후변화의 95%는 인간의 활동에 의해 일어난다는 보고서를 펴내는 등 인간에 의한 기후 파괴 논의를 주도했다.

2015년이 시작되면서도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음은 이어지고 있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과 항공우주국(NASA)은 1월 16일(현지시간) 기온 계측이 시작된 1880년 이래 2014년이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됐다고 밝혔다. 지난해 전 세계 해수면 평균 기온은 관측 사상 최고치였는데, 특이한 것은 해수면 온도를 높이는 엘니뇨 현상이 없었는다는 점이다. 1947년부터 종말시계(Doomsday Clock)를 발표해온 미국 원자력과학자회는 1월 22일 시곗바늘을 종말을 뜻하는 자정 기준 3분 전으로 당겼다. 시곗바늘이 자정 3분 전까지 온 것은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 그라나다 침공, 리비아 폭격, 이란-콘트라 사건 등으로 미국과 소련 관계가 최악에 이르렀던 1984년 이후 처음이다. 원자력과학자회는 2007년에 기후변화가 핵무기보다 더 큰 위협임을 처음으로 강조한 바 있다. 사회적 발언의 수위를 높여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1월 15일 필리핀 방문길에 “기후변화는 대부분 인간활동에 기인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교황은 인간에 의한 기후 파괴 해소를 올해 최우선 과제의 하나로 정했다.

2014년이 지구 기온 계측이 시작된 1880년 이래 ‘가장 더운 해’였음을 보여주는 자료.


이렇듯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지구온난화 위험성을 지적하는 목소리와 자료들은 자고 나면 쏟아져나오고 있는 데도 기후과학자들이 절망하고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9년 터진 기후게이트(Climate-gate)에서 원인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기후게이트는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이 당시 기후변화 연구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던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대학의 기후변화연구소 연구자들의 사적 e메일을 해킹해 인간의 활동이 지구온난화를 불렀다는 기존의 주장이 과장됐으며, 심지어 자료가 조작된 흔적이 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킨 스캔들이다. 그 해 연말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유엔 제15차 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COP15)를 앞두고 터진 이 스캔들은 기후과학이 신뢰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 스캔들 이후 기후과학이나 기후과학 연구자들에 대한 불신은 깊어졌고, 기후변화 담론의 주도권은 환경문제에 관심이 덜한 보수세력에 넘어갔다.

그렇다면 현재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불신하는 ‘기후변화의 적들’이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보수세력은 누구일까. 미국으로 좁혀 보면 하원과 상원을 장악한 공화당의 지도부를 들 수 있다. 미국 칼럼니스트 유진 로빈슨은 1월 20일 트루스디그에 올린 글에서 3인방을 꼽았다. 우선 기후변화 관련 입법을 담당하는 상원 환경공공사업위원회의 위원장인 제임스 인호페 의원(오클라호마주)이다. 인호페 위원장은 자신의 책 <거대한 속임수>(The Greatest Hoax)에서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를 무신론자들과 과학자들의 ‘속임수’이자 ‘음모’라고 주장했다. 또 한 사람은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다. 그는 기후변화에 관한 논의가 기본적으로 미국인의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등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마지막은 미치 매코넬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다. 그는 지구온난화 주범으로 꼽히는 이산화탄소 배출원인 탄광지역 켄터키주를 지역구로 삼고 있다.

자정 3분 전에 맞춘 ‘종말시계’ 이미지.


미국 공화당 지도부의 3인방

이들 뒤에는 지구온난화를 믿지 않거나 위험하다고 인식하지 않으며, 인간활동이 중요한 요인이라고 믿지 않는 거대한 보수파들(2014년 6월 퓨리서치센터 여론조사)이 버티고 있다. 미국 웨스트체스터대의 로렌스 데이비슨 교수는 1월 26일 컨소시엄뉴스 기고에서 이들과 같은 보수파가 기후변화에 대해 불신하는 이유를 종교적 이유와 반지성적 감정, 경제적 이해관계 및 지역 이기주의 등으로 설명했다. 이렇듯 환경문제에 보수적인 지도부가 상·하원을 장악하고 있는 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환경 현안과 기후변화 논의에서 아무리 주도권을 잡으려고 애써봐도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나오고 있다.

교황과 유엔, 기후과학자들이 기후변화가 인류에 미칠 위협에 대해 호소하고 있지만 보수세력의 방어막은 견고해지고 있다. 이들은 오히려 기후과학자들의 대오를 흐트러뜨릴 틈만 노리고 있다. 기후과학자 마이클 만은 이를 ‘세렝게티 전략’으로 설명했다. “기후과학자 전체를 한번에 공격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한 명을 쓰러뜨리는 것은 쉽다.… 이는 탄자니아 세렝게티 국립공원에서 사자 무리가 얼룩말 무리에서 취약한 놈을 솎아내는 것과 비슷하다.”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이 주도하는 담론 구도에 휘둘려 모두가 손을 놓고 있을 때 지구온난화는 회복불능 상황에 처하게 되지 않을까. 호주국립대 제니 멀렐라 박사는 조 더건의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나는 사람들이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기후변화는 중단되고 역전될 것이라고 믿는다. 내 생애 동안 이런 일이 일어나길 바란다. 미래의 어린이들로부터 지구를 파괴한 세대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과연 희망은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