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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월드프리즘

[월드 프리즘7]힐러리 ‘e메일게이트’ 약 될까 독 될까( 2015.03.24ㅣ주간경향 1118호)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전의 막이 오른 것인가. 민주·공화 양당을 통틀어 잠재 대통령 후보 주자 가운데 선두를 달리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68)이 이르면 다음달 대선 출마를 선언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는 가운데 클린턴이 장관 재직시절 관용 e메일 계정 대신 개인 계정을 사용해 연방법을 위반했다는 논란이 미 정가를 달구고 있다. 언론들은 이를 ‘e메일게이트’(emailgate)라고 이름 붙이고, 호재를 만난 공화당도 클린턴에 대한 공세의 기회로 활용할 태세여서 약 1년 8개월 앞으로 다가온 차기 미 대선 캠페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고 있다. 이번 사안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 않지만 클린턴 측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가장 먼저 대선 출마를 선언해 향후 대선가도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클린턴으로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기도 하다. 더욱이 2008년 첫 대선 도전에서 실패한 아픔을 안고 있는 그로서는 이번 논란에 현명하게 대처해야 ‘최초의 부부 대통령’과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전무후무한 타이틀을 동시에 잡는 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 이번 폭로가 독이 될 것인지, 약이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 있는 셈이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이 3월 10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장관 재직 시 관용 e메일 계정 대신 개인 계정을 사용한 것이 위법이라는 논란에 대해 해명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뉴욕타임스 “연방법 어겼다” 주장
e메일게이트는 뉴욕타임스가 지난 2일(현지시간) 클린턴이 장관 재직시절 개인 e메일 계정만 사용해 연방법을 어겼다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불거졌다. 일부 언론은 이번 사안이 법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유력 대선후보 클린턴의 투명성과 보안의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미국인이 클린턴을 얼마나 신뢰하는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척도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보도의 파문은 컸다. 클린턴의 장관 재직 때 일어난 ‘벵가지 사건’(9·11 테러 11주년인 2012년 9월 11일 무장단체가 리비아 벵가지 소재 미 영사관을 공격해 대사를 비롯해 미국인 4명이 숨졌다)을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대표적인 외교 실패사례로 꼽고 있는 공화당은 이 문제를 다루는 하원의 벵가지조사특별위원회를 통해 클린턴에게 소환장을 발부할 것을 검토하는 등 공세의 고삐를 옥죄고 있다. 영국 언론 가디언은 “이번 사안의 가장 나쁜 결과는 공화당에 정치적 공격거리를 제공한 것”이라면서 “만약 클린턴이 e메일을 ‘마사지’할 경우 공화당의 네거티브 공세에 휘말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당 측은 ‘시간이 약’이라는 심정으로 파문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다. 클린턴이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을 지낸 8년 동안 함께한 민주당의 찰스 슈머 상원의원은 워싱턴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파문을 딸꾹질에 비유하며 “6개월이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관심은 클린턴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모아졌다. 논란 제기 후 침묵을 지키던 클린턴은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그는 지난 10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클린턴이 공식 기자회견을 한 것은 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처음이었지만,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차기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그가 이번 사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집중됐다. 하지만 제기된 의혹들을 해소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언론의 평가였다. 회피하지 않고 기자회견에 응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 점은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답변 내용이나 과거와 달라지지 않은 태도 등이 도마에 오른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재임 시절인 2012년 리비아로 가는 군용기 안에서 스마트폰 블랙베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 미 공화당 하원 웹사이트 캡처


기자회견 자청… 의혹 해소엔 실패
월스트리트저널, MSNBC를 비롯한 많은 언론들은 클린턴의 기자회견 후 ‘풀리지 않은 의문 몇 가지’ 식으로 그의 대응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한 휴대전화로 관용 및 개인 e메일 계정을 사용할 수는 없었나’라는 의혹에 대해 클린턴은 “편의를 위해서”라고 답했는데, 오히려 이는 투명성 결여라는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언론들은 클린턴이 쓰고 있는 블랙베리 스마트폰으로 다수의 e메일 계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그 근거로 들었다. 또 ‘누가 개인 e메일 계정 사용을 허용했는가’라는 의혹에 대해서는 장관 재직 때 직원들의 개인 e메일 사용이 허용됐다고 말했으나 누가 승인을 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국무부와 백악관 관계자도 클린턴의 개인 e메일 사용을 승인했는지, 반대했는지 밝히기를 거부했다. 보안문제도 제기됐다. 클린턴은 뉴욕 집의 경우 백악관 비밀경호국에 의해 보호받는 등 많은 방호벽이 있다고 답변했지만 보안 불감증을 드러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e메일 암호화 여부도 문제가 됐다. 인터넷 보안회사 베나피의 케빈 보첵은 클린턴이 사용한 도메인 ‘클린턴이메일닷컴’은 2009년 3월 28일 이후 암호 인증서를 가지고 있었지만 취임 두 달 동안에는 보안 방화벽이 없었다며 이는 클린턴의 e메일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법이나 규정 위반에 대해 클린턴은 개인 e메일 사용이 허용됐다며 “모든 규정을 준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무부는 2005년 매뉴얼에서 보안을 이유로 승인된 컴퓨터 시스템을 사용할 것과 민감하거나 비밀로 분류된 정보를 개인 e메일로 송신하지 못하게 했으며, 2011년에는 개인 e메일 계정 사용을 금지시켰다.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도 정부의 공식 업무를 수행할 때 개인 e메일 계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기준이라고 밝혔으나 클린턴은 기자회견에서 백악관의 기준과 달리 행정부에는 다른 규정이 있다고 답변했다. 시사주간 타임은 이 점을 지적한 23일자 최신호 커버스토리 ‘클린턴 부부의 방식’에서 두 사람의 삶의 방식이 이번에는 바뀔 것인지를 조망해 눈길을 끌었다. 타임은 욕망과 돈, 야망과 이상주의 등 4가지를 두 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소개하면서 야망과 이상주의는 약 반세기 전 두 사람을 정치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됐지만, 욕망과 돈은 앞날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같은 언론의 비판에도 클린턴 측은 기자회견에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클린턴 측근들의 말을 인용해 대선 조직을 재정비하는 데 시간을 버는 등 소득이 있었다고 전했다. 여론도 현재로서는 ‘클린턴 대세론’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다. 월스리트저널과 NBC 방송이 지난 10일 발표한 여론조사를 보면 민주당 당원 86%가 대선후보로 클린턴을 지지해 다른 후보(조 바이든 부통령 54%,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51%)를 압도했다.

클린턴은 이르면 4월에 내년 대선의 첫 후보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4월 출마 선언설이 나오는 것은 미국 대선의 풍향계라고 일컬어지는 코커스(당원대회)가 열리는 아이오와주에서 모금운동을 펼칠 것이라는 언론 보도 때문이다. 미 연방 선거규정에 따르면 전국적인 캠페인을 열어 5000달러 이상을 모금하거나 사용할 경우 15일 안에 출마를 선언해야 하며, 그로부터 10일 안에 연방선거위원회에 후보등록을 해야 한다. 정식 대선후보자 클린턴 앞에는 e메일게이트보다 더 혹독한 시련이 놓이게 될 것이다. 장관 재직시절 클린턴재단 거액 기부금과 퇴임 후 불거진 고액 강연료 문제에서부터 고령에 따른 건강문제와 변하지 않은 특유의 독단성과 같은 성향, 보수적 정책에 대한 당내 진보세력의 비판은 물론 지금껏 드러나지 않은 모든 것이 검증 대상이 된다. 1992년 퍼스트레이디가 되면서 화려하게 공적 무대에 진출한 클린턴은 지난 약 반세기 동안 숱한 실수를 범했다. 클린턴은 이번 e메일게이트에서 무엇을 배웠으며, 미국인들은 e메일게이트에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클린턴은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이와 관련해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다나 밀뱅크는 클린턴의 최대 도전자는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반복하는 정치인에게 국민은 등을 돌린다는 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