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미국 중동정책 변화의 부산물… 이스라엘과 이란에 견줄 만한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
지난 3월 초 사우디아라비아가 인도를 제치고 지난해 세계 무기 수입 1위 국가에 올랐다는 보고서가 발표됐다. 군사정보 분석업체 IHS가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사우디의 무기 수입액은 전년도보다 54% 늘어난 65억 달러였다. IHS는 올해 사우디의 무기 수입액이 98억 달러로, 전 세계 무기 수입액의 7분의 1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사우디가 군사력을 강화해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사우디 주도로 3월 26일 시작된 예멘의 시아파 반군 후티에 대한 군사작전을 떠올리면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사우디는 지난해 9월 미국이 시리아에서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을 때만 해도 측면지원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투기 100대와 병력 15만명을 동원하며 작전을 주도했다. 사우디가 오일 강국에 이어 군사 강국으로까지 자리매김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란의 핵시설 공격을 위해 이스라엘 전투기의 자국 영공 통과를 허용할 것이라는 얘기가 돌면서 앙숙 이스라엘과의 관계개선 가능성마저 나오고 있다. 요약하면 사우디가 지금까지 중동지역의 맹주로 군림해온 양대 산맥인 이스라엘과 이란에 견줄 만한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사우디가 중동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르게 된 배경에는 미국의 중동정책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첫 번째 배경은 실패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이라크전에서의 정책 변화다.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한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는 수니파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축출한 이후 득세한 시아파에 대항해 이라크 안에서 온건 수니파를 육성하려는 정책을 폈으나 실패하자 정책 방향을 대전환했다. 이것이 2006년 부시 행정부의 ‘새로운 중동’ 계획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중동지역에서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이란 봉쇄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이란을 약화시키기 위한 비밀작전을 수행한다. 그 결과 수니파의 좌장인 사우디의 역할이 강조됐고, 이란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처하기 위해 앙숙이던 사우디와 이스라엘이 전략적으로 협력을 모색하게 됐다.
탐사보도 전문기자 시모어 허시는 2007년 3월 뉴요커에 쓴 ‘방향 전환’이라는 기사에서 부시 행정부의 정책 전환은 당초 수니파 국가였던 이라크에서 시아파가 준동하면서 온건 수니파를 지원하려던 미국의 도박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이란 봉쇄를 위해 사우디의 역할이 중요해졌음을 미 행정부가 공식 인정하게 됐다고 했다. 당시 싱크탱크 미외교협회(CFR)의 발리 사드르 선임연구원은 “사우디와 부시 행정부 안에서 최대 위협이 누구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 이란이 최대 위협이라고 결론났다”면서 “이는 사우디 쪽의 승리”라고 말했다.
3월 26일 사우디아라비아 공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수도 사나의 건물더미 속에서 생존자 구조 및 시신 수습작업을 벌이고 있는 예멘의 시아파 후티 반군들. 이들은 지난달 초 쿠데타로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대통령을 쫓아낸 뒤 사나를 장악했다. / EPA연합뉴스
앙숙인 이스라엘과 관계개선 가능성
두 번째 배경으로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중동정책이 적대적 대결구도에서 대화국면으로 바뀐 점을 들 수 있다. 오바마는 부시 행정부가 시작한 아프간·이라크전을 끝내고 잠재 위협인 이란과의 핵 협상 타결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하지만 중동 정세를 악화시킬 수 있는 데다 미 대통령들이 전통적으로 이스라엘과 사우디를 지지해온 기존 대외정책 방향과도 맞지 않는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CFR 선임연구원 맥스 부트는 3월 25일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오바마가 과거 중동에서의 미국 역할을 바꾸려 하고 있다”면서 “과거의 적인 이란을 친구로 만들고 최우방인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1960년대 이후 최악의 상태로 만들려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오바마가 중동에서 짊어온 짐을 이란에 맡기고 발을 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중동정책 변화가 가져온 긍정적인 요인으로는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관계개선 가능성을 들 수 있다. 사우디 석유장관 알리 알나이미는 지난해 11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스라엘에 석유를 팔 의향이 있음을 전했다. 이보다 몇 달 전에는 투르키 알 파이잘 전 사우디 정보책임자가 이스라엘 최대 일간지 하레츠에 이스라엘의 중동정책에 관한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이란 핵시설에 대한 공격을 위해 두 나라가 협력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도는 가운데 나왔다. 두 나라의 관계개선은 전략적으로 미국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반면 정책 전환의 부정적인 결과로는 IS라는 괴물의 탄생과 사우디의 이란 위협 노출을 꼽을 수 있다. IS는 미국이 이라크 정책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미국은 2006년 활개치는 시아파에 대항하기 위해 온건 수니파를 강화하는 전술이 실패로 끝나자 종파간 갈등을 부추기는 정책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잘못된 결과물이 IS였다. 당시 미국은 수니파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드를 비롯한 많은 수니파 무장조직원들을 석방하고 지원했다. 하지만 알바그다드는 지난해 IS의 지도자가 돼 신정일치의 칼리프 국가 건설을 내걸고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무장투쟁을 하면서 미국의 최대 골칫거리가 됐다.
무기 수입 늘리고 예멘 군사작전 주도
사우디는 부시 행정부가 종파간 갈등을 부추기기 위한 정책 전환에 따라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했지만 오바마의 정책 전환으로 오히려 불안한 상황에 빠졌다. 오바마의 정책 변화는 사우디 입장에서 보면 ‘미국은 안보, 사우디는 석유’라는 오랜 관계틀을 깨뜨리는 일로, 이란 위협에 사우디를 노출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서 사우디는 여전히 중동에서 시아파 이란에 대항하는 중요한 국가임을 미국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무기 수입을 늘리고 예멘 군사작전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데이비드 코트라이트 미 노테르담대 교수는 사우디가 최대 무기 수입국이 된 배경에 대해 AP통신에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 타결 가능성이 사우디와 미국의 오랜 유대관계를 위협하고 있다”면서 “사우디의 무기 수입 증가는 사우디가 여전히 미국의 중요 우방이라는 점을 환기시켜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우디의 예멘에 대한 군사작전의 직접적인 원인은 자신의 뒷마당처럼 여기는 예멘 정세를 불안하게 하는 시아파 후티 반군 때문이지만, 그 뒤에는 이란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사우디는 예멘과 1800㎞에 이르는 국경을 맞대고 있고, 예멘 북부에는 시아파가 준동한다. 지난 2월 초 후티 반군의 쿠데타로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대통령이 수도 사나에서 쫓겨나 남부 아덴으로 도망친 이후 사우디의 안보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따라서 후티 반군의 뒤를 이란이 봐주고 있다고 여기는 사우디가 미국과의 공조로 군사작전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우디가 중동의 강자로 떠오른 것은 미국의 정책 변화에 따른 당연한 결과물이었다. 이는 향후 미국 정책에 따라 사우디의 위상이 언제든 달라질 수 있음을 뜻한다. 사우디는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나 1991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미국에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냉전 종식과 9·11 이후 양국관계는 삐걱거렸다. 더욱이 미국인들은 범죄자를 참수하고 채찍질하는 인권탄압 때문에 사우디에 등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나의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말처럼 각국이 처한 이해관계에 따라 중동에서의 역학관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과거의 적 미국-이란과 이스라엘-사우디가 각각 손을 잡는 현실은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미국으로서도 중동 내 경찰국가 역할을 맡아온 사우디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다.
향후 중동 내 사우디의 위상을 가늠할 최대 변수는 이란 핵 협상이다. 핵 협상이 조만간 타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협상 타결은 이에 반대해온 사우디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손을 맞잡고 이란을 공격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1981년 6월 이라크 핵시설을 공격했는데, 사우디는 이스라엘 전투기가 자국 영공을 통과하는 것을 묵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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