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인다는 게 뭐지?”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왕자>에서 길을 떠난 어린왕자가 도중에 만난 여우에게 묻는다. 여우가 답한다. “그건 사람들 사이에서는 잊혀진 것들인데… 관계를 만든다는 뜻이야.” 학창 시절 <어린왕자>를 읽으면서 ‘관계’가 무엇인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길들이다’라는 단어를 떠올린 까닭은 국가정보원의 해킹 의혹 사건 때문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국정원 해킹 프로그램의 민간인 사찰 의혹 사건의 진실과 실체가 밝혀질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가져올 결과다. 바로 국정원의 ‘국민 길들이기’ 효과다.
국가 정보기관은 국가안보를 이유로 정보를 독점한다. 국민들도 어느 정도 이를 용인한다. 하지만 결과는 대부분 파국으로 끝났다. 2013년 6월 전 세계를 뒤흔든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불법 대량감시활동이 대표 사례다. NSA는 테러 용의자를 감시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댔지만 다른 나라 정상들의 휴대전화는 물론 일반 국민들의 전화기와 이메일 등을 훔쳐본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안보라는 논리를 국가 스스로가 무너뜨린 셈이다. 국정원의 해킹 의혹 사건이 터지자 정부·여당도 예의 안보 논리를 폈다. “국정원의 정보역량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 “안보 자해행위”라는 비난이 그것이었다.
비록 국정원의 해킹 의혹 사건은 지금까지 하나도 풀린 게 없지만 정부로서는 수확이 있다. 바로 국민 겁주기다. 국민들은 진실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겁을 먹고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게 만드는 효과 말이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식코>에서 영국 전 의원 토니 벤이 영국 의료보험 민영화에 대해 언급하며 우리에게 준 가르침이다. “국민을 통제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공포를 주는 것이고, 둘째는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겁주고 기죽이는 것’이다.
미 행정부도 국가기밀을 언론에 누설한 내부고발자를 길들이기 위해 비슷한 방법을 활용했다. 바로 간첩죄 기소다. 1917년 미국에서 간첩죄가 만들어진 이후 정보제공 혐의로 이 죄목에 걸려 기소된 이는 11명이다. 이 가운데 버락 오바마 행정부 출범 후 기소된 이는 8명. 재미 핵과학자 스티븐 김을 비롯해 NSA 불법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 이라크·아프가니스탄전 비밀문서와 외교전문을 공개한 첼시 매닝(브래들리 매닝) 등이다. 미 행정부의 노림수는 무엇이며, 미국인들은 이로부터 무엇을 배울까. 바로 겁을 주는 것이다. 물론 미 정부의 겁은 통하지 않는다. 내부고발자가 이어지고 있음이 이를 방증한다. 내부고발은 국가권력으로 통제되는 것이 아닌, 자유의지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길들이기는 어린왕자의 길들이기와는 당연히 차원이 다르다. 서로에게 관심을 쏟는 것, 서로에게 유일하거나 의미있는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국가와 국민 간의 바람직한 관계일 터이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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