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 푸어(Working Poor)와 난워킹 리치(Non-working Rich)가 함께 증가하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다. 이는 일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미국의 가치를 훼손해 결국은 미국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1990년대 빌 클린턴 미국 행정부에서 노동장관을 지낸 버클리대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 교수는 지난 3월 말 허핑턴포스트에 기고한 ‘워킹 푸어와 난워킹 리치의 증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그는 미국의 10대 부자 가운데 6명은 자산을 물려받은 상속자라고 주장하면서 월마트 가문의 재산이 미국 하위 40%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다는 사례를 들었다. 그리고 2007년부터 2061년까지 상속될 자산규모는 59경 달러라는 보스턴대 연구자료를 인용했다. 당연히 반발이 나왔다. 휴스턴대학의 폴 로데릭 그레고리 교수는 “팩트부터 잘못됐으니 공부 좀 더하라”고 비아냥대는 글을 포브스에 썼다. 그는 포브스 400대 기업 가운데 부자 가문에 속하는 비율이 1982년 60%에서 2011년에 32%로 떨어졌다는 연구자료를 들어 반박했다.
자신의 신념을 강조하기 위해 유리한 자료를 인용하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워킹 푸어, 난워킹 리치 논쟁의 핵심은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 뒤에 감춰진 진실을 보는 데 있다. 미국 성장의 원동력은 누구든 일하는 만큼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에 있다. 그 아메리칸 드림이 무너지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를 의미하는 ‘1대 99 사회’라는 적대적 표현은 부자 혐오의 대명사가 됐다. 그것이 현실에서 폭발한 사례가 ‘월가 점령운동’이다.
아무리 일해도 생계유지가 힘든 워킹 푸어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88만원 세대’로, 유럽에서는 ‘700유로 세대’로 일찌감치 자리잡았다. 반면 일하지 않고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돈으로 즐기는 난워킹 리치-굳이 비유하자면 ‘재벌 3세’쯤 되겠다. 물론 재벌 3세 모두가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는 과거보다 늘어나지는 않겠지만 엄연히 존재하며 사회 통합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예로부터 난워킹 리치 증가는 국가 존립의 중요한 요소였다. 일찍이 마하트마 간디는 나라가 망하려는 7가지 징조에 ‘노동 없는 부자들의 급속한 증가’를 꼽은 바 있다.
정부의 노동개혁 추진에 노동계가 반발하고 있다. 이들의 반발 속에는 부자 혐오 심리가 깔려 있다. 회사에 쌓아둔 유보금을 청년고용과 임금인상에 활용하라는 이들의 호소가 설득력 있게 들린다. 난워킹 리치라는 말을 듣는 게 억울하거나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주문하고 싶다. “난, 난워킹 리치가 아니라 워킹 리치야!”라고 당당하게 외쳐보라고 말이다. ‘난워킹 리치’와 ‘난, 워킹 리치’. 말장난이 아니다. 피땀 흘린 부자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이 변한다면 그들을 바라보는 99%의 시선도 달라진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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