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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10]아무도 집을 떠나지 않는다(2015.09.22ㅣ주간경향 1144호)

‘아무도 집을 떠나지 않는다/ 집이 상어의 아가리가 되지 않는 한/ ……/ 아무도 자식들을 보트에 태우지 않는다/ 바다가 육지보다 더 안전하지 않는 한/ ……/ 아무도 난민 캠프나 알몸 수색을 선택하지 않는다/ 당신의 몸이 아픈 채로 버려지는/ ……/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집은 상어의 아가리이고 총구다/ 그리고 아무도 집을 떠나지 않는다/ 집이 당신을 뒤쫓지 않는 한/ 집이 다리를 재빨리 움직이라고 말하지 않는 한/ …….’

 

케냐 태생의 소말리아계 영국 여성시인 와르산 쉬레(27)의 ‘아무도 집을 떠나지 않는다(No One Leaves Home)’이다. 두 장의 사진이 이 시를 떠올리게 했다. 터키 해변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세 살배기 소년 아일란과 독일 뮌헨역에 도착해 환히 웃으며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고 있는 5살 소년 마무드다. 시는 자기 땅을 떠나야 하는 난민들의 애환과 절규를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양 묘사하고 있다. 2014년에 ‘젊은 계관시인’이 된 쉬레도 알고 보니 한 살 때 영국으로 이주한 난민 출신이었다.

아일란과 마무드의 운명을 가른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들은 왜 집을 떠나야 했을까. 이들을 난민 보트나 기차에 타게 한 것은 시리아 내전이다. 내전의 참상은 그들의 터전을 상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바다보다 안전하지 못한 곳으로 만들었고, 남의 땅으로 벌거숭이인 채 그들을 내몰았다. 내전의 원인을 두고는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탓이니, 미국의 아랍의 봄 정책 탓이니, 미국의 무기 판매와 무역협정이 낳은 결과라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원인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보니 해법 또한 난망할 따름이다.

아일란의 죽음은 외면으로 일관해온 세계인의 시선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쳤다. 유럽연합은 난민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수용인원을 16만명으로 12만명 늘리겠다고 밝혔다. 무엇보다도 남의 일처럼 뒷짐만 지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온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내년 회계연도에 최소 1만명의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일 것을 지시했다.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유대인 난민을 제외하고는 일절 받지 않고 오히려 장벽을 쌓겠다고 엄포를 놓는 이스라엘 같은 나라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난민사태를 바라보는 인식이 변하지 않고 그 근본 뿌리를 제거하지 않는 한 난민 할당 수를 늘리는 정책은 한 편의 슬픈 ‘정치적 쇼’로 그칠 게 뻔하다. 죽음 앞에서만 잠시 고뇌하는 장면은 너무나 익숙하지 않은가. 거기에 비해 현실은 암담하다. 우리 모두가 이민자 또는 난민들의 후손인데도 여전히 ‘난민’이라고 쓰고 ‘이주민’, 심지어 ‘테러리스트’로 읽는다. 아일란의 사진을 게재하느냐 마느냐를 두고도 논란이 벌어지고, 아프리카 출신 난민과 시리아 난민을 구분 짓고 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한 죽음의 행렬은 이어질 것이다. 비록 자기 땅에서 사람들을 내모는 무기(arms)가 다른 곳에서는 이들을 환대해주는 두 팔(arms)이 되기도 하지만, 아무도 집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