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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20]복면 벗기기(2015.12.08ㅣ주간경향 1154호)

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과 눈웃음 짓는 듯한 눈매, 그리고 양쪽 끝이 위로 치솟은 콧수염과 세로로 한 줄로 난 턱수염. 가만히 보면 전체적으로 상대방을 조롱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이 얼굴의 주인공은 ‘가이 포크스’ 가면이다. 410년 전에 영국 국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실존 인물이다. 그 후 영국에서는 국왕의 무사와 암살음모 재발 방지를 위해 그의 상을 태우는 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최근 ‘11·13 파리 테러’를 자행한 이슬람국가(IS)에 사이버 전쟁을 선포한 국제 해커집단 ‘어나니머스’ 덕분에 가이 포크스가 다시 유명세를 탔다. 가이 포크스가 축제 속 인물에서 현대적 의미로 되살아난 계기는 약 10년 전쯤 상영된 영화 <브이 포 벤데타> 덕분이다. 영화의 주인공 브이가 이 가면을 쓰면서 저항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 저항의 정신은 2011년 유럽과 미국 등 전 세계를 휩쓴 신자유주의와 긴축 반대 시위인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사람들)’ 및 ‘월가점령’ 때 이미 경험한 바 있다.

TV 프로그램 중 재미있게 보는 게 <복면가왕>이다. 가수를 비롯해 노래에 재능이 있는 유명인들이 온갖 장식을 한 복면을 쓴 채 노래를 부른다. 이들은 방청 패널단의 요구대로 기이한 춤도 추고 모창과 같은 장기를 펼친다.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우스꽝스런 행동도 복면을 썼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시청자와 방청객들은 복면 뒤에 숨은 가수의 재발견에 놀란다. 이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복면가왕>이 폐지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소셜미디어를 타고 나온다. 정부와 여당이 시위 원천봉쇄를 위해 ‘복면 착용 금지법’ 추진을 운운하면서다. 정부·여당은 이미 역사교과서 국정화 집필진을 공개하지 않아 ‘복면 정부’라는 비난을 자초한 바 있다. <복면가왕>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일 터이다.

<복면가왕>을 만든 방송이 누군가. 정권과 코드를 맞춰온 <MBC> 아니던가. 그런 <복면가왕>이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주범이라니. 불경죄를 지었다는 얘기인데, 가당찮은 일이다.

하지만 <복면가왕>을 자세히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복면가왕에 오른 가수는 첫 방송이 끝나기 전부터 누구일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한다. 결국은 시청자들의 추측이 맞아떨어지고 정체가 드러난다. 4대 복면가왕까지 간 김연우나 거미도 초반부터 그랬다. <복면가왕>은 우리 국민들이 복면 벗기는 일에 도가 텄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복면가왕>이 폐지된다면 족집게 시청자들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저항의 상징인 가이 포크스 가면은 어느 누구도 강제로 벗길 수 없다. 시민의 저항정신은 국가 권력 따위에 결코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복면가왕> 시청자들의 명민함을 우리의 ‘복면 정부’가 의식하지 못한다면 국정운영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시민들로부터 강제로 복면이 벗겨지는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면 정부는 스스로 복면을 먼저 벗어야 하지 않을까. 복면이 벗겨지는 게 두려워 더 억압하려 한다면 더 큰 저항에 부딪히리라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