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풍경한 2015년 세밑에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을 듣는다.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사랑과 순결이 넘쳐 흐르는 이 땅/ …/ 아 대한민국, 아아아 저들의 공화국/ 아 대한민국, 아아아 대한민국….”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한 정태춘의 목소리가 칼바람처럼 가슴을 파고든다. 1990년부터 25년간 듣고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노랫말 속의 풍경이 현재에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2015년 대한민국의 풍경은 25년 전 정태춘이 부른 노래 속의 대한민국과 결코 다르지 않다.
25년 전 대한민국은 “새악시 하나 얻지 못해 농약을 마시는 참담한 농촌의 총각들”과 “최저임금도 받지 못해 싸우다 쫓겨난 힘없는 공순이들”로 넘쳤다. “하룻밤 향락의 화대로 일천만원씩이나 뿌려대는 저 재벌의 아들”과 “벌건 대낮에도 강도들에게 잔인하게 유린당하는 여자들”도 함께 살고 있었다. “닭장차에 방패와 쇠몽둥이를 싣고 신출귀몰하는 우리의 백골단”도, “하루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인사”도 함께 사는 그런 나라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15년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인가. 멀쩡한 국민을 “혼이 비정상”인 사람으로 만드는 대통령과 그런 대통령의 말을 복창하는 장관들과 함께 사는 나라다. ‘국가비상사태’ 운운하며 국민과 야당의 탓으로 돌리는 여당의원들과 국민의 고통과 절망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쟁만 일삼는 야당의원들과도 함께 살고 있다. 시위대에 물대포를 쏴 사경을 헤매게 하고 거액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거는 경찰들과 창고에 잔뜩 돈을 쌓아 놓고 일자리를 달라는 청년들의 호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해고의 칼날을 휘두르는 기업들과 함께 말이다.
대통령과 정치인, 기업가의 입에는 “국민을 위해서”라는 말이 달려 있다. 하지만 현실 속 그 어디에도 국가의 주인인 국민은 보이지 않는다. 25년 전에도 그랬고, 45년 전에도 그랬다. 1970년 시인 김지하가 본 박정희 정권은 다섯 도둑(오적)의 세상이었다.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권력자들에게 대한민국은 언제나 ‘저들의 공화국’이었다. 해고의 칼날 앞에서도 끄떡없는 예외자로 군림하는 그런 나라 말이다. 국민은 오로지 헌법 조문 속에만 존재하는 박제된 인간일 뿐이다. 정태춘이 노래하듯 우린 “허리 잘려 찢겨진 상처로 아직도 우는데 군림하는 자들의 배부른 노래와 피의 채찍 아래 마른 무릎을 꺾고 우린 너무도 질기게 참고 살아왔”다.
국가비상사태라는 말까지 들어야 하는 2015년 세밑은 살풍경하다 못해 참담하다. 한 해 동안 살풍경한 말을 워낙 많이 들은지라 한 귀로 흘릴 수 있겠다 싶었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서슬 퍼렀던 유신시대로 돌아가려는 게 정권의 목표라는 풍자를 비웃는 신호탄처럼 여겨진다. 대통령과 여당이 국민을 윽박지르고, 도외시하고, 군림하려는 풍경은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비상사태에 빠졌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2015년 겨울,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나. 아 대한민국….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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