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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22]타이밍의 역풍(2015.12.22ㅣ주간경향 1156호)

미국인들이 흔히 쓰는 표현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고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쉽게 말하면 “그 시간에 거기 있은 사람이 잘못”이라는 뜻이다. 피해자는 “재수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고, 가해자는 면죄부를 받는다. 이 표현이 떠오른 것은 두 가지 일 때문이다. 하나는 <뉴욕타임스>가 95년 만에 처음으로 1면에 사설을 실었다는 뉴스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정부·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테러방지법이다.

‘전염병 같은 총기 확산’이라는 제목의 지난 5일자 <뉴욕타임스> 1면 사설은 총기규제에 무책임한 정치권과 무관심한 유권자들을 질타하며 규제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도덕적으로 분노할 일이며 국가의 치욕이다.” “총기 확산을 통해 이득을 챙기는… 정치인들에게 미국인들의 관심과 분노가 향해야 한다.” “미국이 품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 대선 기간보다 좋은 기간이 있을까.” 말 그대로 주옥 같은 진단과 제안이지만 돌아온 것은 총탄 구멍 난 신문 사진이었다. 한 우익 라디오 진행자이자 블로거가 자신의 트위터에 1면 사설이 실린 신문에 총탄 구멍 7개가 난 엽기사진을 올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뉴욕타임스> 사설에 대한 내 생각”이라고 썼다. 마치 <뉴욕타임스>가 테러를 당한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한 극렬 총기 옹호자의 주목을 끌기 위한 행동이지만 총기규제를 반대하는 미국인들의 대체적인 정서가 아닐까 싶다.

‘총격당한 <뉴욕타임스> 1면 사설’은 아무리 좋은 제안도 타이밍을 잘못 잡으면 역풍을 맞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1면에 사설을 싣기 사흘 전, 총기 옹호론자들이 ‘9·11테러 이후 최악의 테러’라고 하는 샌버나디노 총격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이미 9·11테러와 지난달 이슬람국가(IS)가 자행한 파리 테러에 놀란 미국인에게 총기규제 운운하는 <뉴욕타임스>의 사설은 ‘헛소리’가 됐다. 물론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때마침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총기구매자 신원조사를 확대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할 것이라는 소식도 나온다. 강력한 총기규제가 있는 국가에서 총격 관련 사건이 줄어든다는 보도도 잇따른다. 하지만 “법이 없어서 총격사건이 끊이지 않은 걸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에는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반대로 국내에서는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파리 테러를 계기로 15년째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테러방지법을 밀어붙이려고 해 반발을 사고 있다. “법안이 없어 국민을 못 지키겠다는 말을 국군 통수권자에게 듣게 될 날이 올 줄 몰랐다”(심상정 정의당 대표), “살인금지법이 없어서 살인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역사학자 전우용). 정치든 언론이든 타이밍이 중요하고, 타이밍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타이밍의 역풍 또한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뉴욕타임스> 1면 사설이 ‘재수 없는 일’로 치부돼서도 안 되고, 정부·여당의 테러방지법 추진이 면죄부가 돼서도 안 된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yh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