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곽재구는 1960~70년대에 만연했던 일본인의 한국 기생관광 모습과 감상을 시 ‘유곡나루’에서 이렇게 그렸다. ‘육만엔이란다./ 후쿠오카에서 비행기 타고 전세버스 타고/ 부산 거쳐 순천 지나 섬진강 물 맑은 유곡나루/ 아이스박스 들고 허리 차는 고무장화 신고/ 은어잡이 나온 일본 관광객들/ 삼박사일 풀코스에 육만엔이란다./…/ 육만엔이란다, 낚시대 접고 고무장화 벗고/ 순천 특급호텔 사우나에서 몸 풀고 나면/ 긴밤 내내 미끈한 풋가시내들 서비스 볼 만한데/ 나이 예순 일본 관광객들 칙사 대접받고/ 아이스박스 가득 등살 푸른 섬진강/ 맑은 물 값이 육만엔이란다.’
3박4일 풀코스 6만엔. 어디 섬진강과 순천 일대에서만 그랬을까. 외화벌이 목적으로 일본인 관광을 장려한 게 정부였으니, 3박4일 풀코스 6만엔은 당시 우리의 벌거벗은 모습이었다. 가수 정태춘은 곽재구의 이 시를 살짝 개사해 ‘나 살던 고향’이라는 제목을 붙여 애절하게 노래했다. 그의 노래를 듣다 보면 매춘관광으로 짓밟힌 당시 한국의 현실이 눈에 아른거린다. 이런 류의 기생관광은 이제 사라졌을까.
그런데, 10억엔이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 대가로 일본이 한국 정부에 지원할 금액이 그렇단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 238명(생존자는 46명)이 그 고초를 겪은 대가가 100억원이 채 안 된다. 물론 위안부 문제는 일본인 기생관광과 같이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3박4일 풀코스 6만엔짜리 기생관광 상품이 떠오르는 건 우리의 처지가 당시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서글픔, 안타까움, 분노, 치욕…. 피해자들의 지울 수 없는 아픔과 상처에 대한 진정한 사과 없이, 법적 배상금이 아닌 돈으로 보상하려는 일본 정부나 이를 받아들인 한국 정부. 위안부 할머니들이 치욕스러워 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를 치욕스럽고 분노하게 하는 것들은 또 있다. 이 10억엔도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전제로 지원을 하겠다는 일본 언론들의 보도다. 두 나라 정부는 이 같은 보도에 펄쩍 뛰며 부인하고 있지만 ‘혹시 이면 합의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위안부 할머니를 우롱하는 이 같은 정부의 태도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과정에서 필진을 감추려고 깜깜이 전략으로 일관해온 것과 너무나 닮아서다. 또 하나는 앞으로 정부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더 이상의 합의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합의에 포함된 ‘최종적 및 불가역적’이라는 문구 때문이다. 시쳇말로 ‘낙장불입’이라는 건데,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이런 합의를 했는가’ 하는 지탄과 조롱의 목소리가 쏟아질 수밖에 없다.
‘10억엔이란다./ 나 살던 고향에서 군함 타고/ 만주 거쳐 태평양 거쳐 이역만리/ 더럽고 허름한 군 위안부 건물/…/ 갖은 고초와 치욕, 목숨의 대가가 10억엔이란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과 고통을 10억엔과 맞바꾼 굴욕을 시인과 가수는 또 어떻게 노래할까.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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