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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26]용서 아닌 책임을 추궁해야 할 때(2016.01.19ㅣ주간경향 1160호)

“하나님이 이 죄 많은 이에게 찾아와주시고, 그 많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그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한 장면이다. 자식을 잃은 엄마는 가해자를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 면회를 갔다가 하나님에게 죄를 용서 받았다며 편안하게 말하는 가해자를 보며 몸을 떨고 돌아서 나온다. 그러고는 절규한다. “어떻게 용서를 해요? 용서를 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이 용서를 받았다는데, 그래서 마음이 평화롭다는데…, 이미 하나님이 용서를 하셨다는데 어떻게 내가 다시 용서를 해요?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어떻게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그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용서 받고 구원을 받았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 발표 이후 이 영화 장면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밀양>은 피해자는 용서하지 않았는데도 가해자는 신으로부터 용서 받은 아이러니를 그린 영화다. 현실에서도 위안부 문제를 용서라는 단어로 덮으려는 몰염치가 곳곳에서 넘쳐난다. 엄마부대라는 단체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용서할 것을 강요한다. “일본을 용서하는 것이 일본을 정신적으로 제압하는 것이 아닐까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축하인사까지 보냈다. “한·일 양국이 24년간 어려운 현안이었던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합의에 이른 것을 축하한다.” 이 같은 위안부 합의를 환영하는 측의 ‘애국자 코스프레’는 본말전도의 전형이다. 위안부 동원은 일본의 전쟁범죄다. 가해자는 일본이고, 피해자는 위안부 할머니들이다. 일본은 정식 사과조차 하지 않는데도 한국 정부는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줘버렸다. 그것도 다시는 이 문제를 언급할 수 없는 조건으로 말이다. 피해자의 고통과 분노를 풀어줘야 할 정부가 오히려 피해자 가슴에 비수를 꽂는 가해자가 된 셈이다.

공자는 용서(恕)를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己所不欲勿施於人)’고 했다. 제자 자공이 ‘제가 평생 동안 실천할 수 있는 한마디의 말이 있습니까(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라고 청한 데 대한 답이었다. 평생 가슴에 품고 실천해야 하는 말이 용서다. 사인 간의 관계에서도 용서는 쉽지 않다. 신도 대신할 수 없다. 용서의 본질이 이러한데도 한국 정부는 너무나 쉽게 이 말을 입에 올렸다. 돈 몇 푼에 용서를 구걸했다. 피해자가 고통을 받고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았는데도 정부가 어떻게 용서라는 말이 버젓이 입에 오르내리는 상황을 만들 수 있을까. 참으로 아큐의 정신승리법이라도 배워야 한단 말인가.

이번 발표가 역사바로세우기 범국민운동의 계기가 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야권은 국정조사로 이번 합의의 진상을 규명해 책임자를 추궁해야 한다. 국민들은 정부의 기만과 정치권의 무행위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그것이 치욕과 참담함을 딛고 서는 첫 단계다. 궁극적으로는 평화의 소녀상 이전이나 수요집회 중단과 같은 참사를 막고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과 극우주의자들의 준동에 대처할 수 있는 길이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uyng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