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가. 지난해 1월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 모독 만화를 실었다는 이유로 테러를 당한 프랑스 만평 전문지 <샤를리 에브도>를. 그리고 지난해 9월 난민선 사고로 숨진 3살배기 시리아 아이 아일란 쿠르디를. 언론 및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과 난민사태의 심각성을 죽음으로 보여준 사례들로, 세계는 연대와 애도를 보냈다. 그렇다면 <사를리 에브도>가 쿠르디의 죽음을 만평의 대상으로 삼아 조롱한 사실을 아는가.
<샤를리 에브도> 최신판은 ‘이민자’라는 제목으로 쿠르디를 등장시켰다. 만평은 쿠르디 시신 모습과 함께 ‘꼬마 아일란이 자라면 무엇이 됐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아래에는 두 손바닥을 내민 남성 두 명이 달아나는 두 여성을 쫓아가는 그림이 있다. 그 밑에는 ‘독일에서 엉덩이를 더듬는 사람’이라는 글이 있다. 이 만평은 쿠르디와 지난해 마지막 날 밤 독일 쾰른에서 일어난 집단 성폭행 사건을 연결한 것이다.
그런데 인종주의 및 극우주의 냄새가 짙게 풍겨난다. 쿠르디 같은 아이가 자라봤자 성범죄자밖에 더 되겠느냐는 비아냥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만평지가 쿠르디를 소재로 삼은 게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난해 쿠르디 사망 직후에는 그의 시신 사진을 등장시키고, 그 옆에는 ‘목표에 다 왔는데’ ‘어린이 햄버거 세트 하나 가격에 두 개’라는 글이 적힌 광고판을 그렸다. 아이의 죽음을 폄훼했다는 지탄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샤를리 에브도>는 그전부터 테러를 부른 무함마드를 모독하는 만평으로 유명세를 떨쳐 왔다. 풍자나 조롱의 대상에는 예외가 없었다. 프란치스코 교황,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도 도마 위에 올랐다. 언론 및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린 것이다. 편집진도 대놓고 말한다. “언론의 자유는 절대적인 권리”라고. 세계도 호응했다. 하지만 <샤를리 에브도> 만평을 보는 시각에는 호불호가 존재했다. 말하자면 <샤를리 에브도>가 테러를 당했을 때 세계가 보인 뜨거운 연대는 언론 및 표현의 자유가 테러당해서였지 만평의 내용을 옹호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론 및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정답은 없다. 아무리 헌법으로 보장해도 온전히 지켜진 시대는 없었다. 오히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부인하는 증오연설이나 반유대주의 발언의 경우, 때로는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제약됐다. 이 때문에 선별적 또는 이중적으로 적용된다는 비판이 따랐다.
쿠르디를 잠재적 성폭력범이나 햄버거 구걸꾼으로 묘사한 <샤를리 에브도> 만평은 유럽의 골칫거리인 난민 문제를 풍자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칼끝은 엉뚱한 곳을 겨냥하고 말았다. 풍자나 조롱, 비판이 공감을 얻으려면 그 칼끝이 강자, 즉 권력자나 절대자를 향해야 한다. 또 국가에 의한 폭력에 대한 항거여야 한다. 그리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외침과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반대로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약자를 겨눈다면 지탄의 부메랑이 되게 마련이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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