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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28]“얼마나 답답 하시면…“ 화법 유감(2016.02.02ㅣ주간경향 1162호)

박근혜 대통령의 ‘민생구하기 입법 촉구 천만 서명운동’ 참여에 대한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관제’ 냄새가 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야당은 대통령의 행위를 “관제 서명”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대통령의 담화 발표를 시작으로 재계의 동참 발표, 대통령의 서명, 관료와 대기업의 잇단 참여가 이어지면서 정부의 압박에 의해 짜여진 각본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통령이 앞장섰는데 관제와 관치에 익숙한 관료와 기업들이 따라가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울며 겨자 먹는 심정일 테다. 중·고교 시절을 독재정권 시절에 보낸 50대라면 박제된 관제의 추억이 되살아나 몸이 떨릴지도 모르겠다.

물론 청와대는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했다고 강조하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대통령이 개인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 과연 개인의 행동으로 읽힐까. 특히 늘 대척점에 서서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재계와 노조가 개입된 사안의 경우에 말이다. 대통령은 어느 한쪽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국민통합은 대통령의 중요한 임무다. 백 번 양보해 대통령이 주장하는 민생구하기 법안에는 정말로 민생에 도움이 되는 법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논란이 되는 법은 여야가 합의해 처리해야 하는 게 순리다. 실제로 ‘원샷법’으로 불리는 기업활력제고특별법 등 일부 쟁점법안은 그게 옳든 그르든 처리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대통령의 서명 참여가 문제가 되는 것은 관제에 대한 아픈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과거 독재정권 시절로의 회귀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데 있다. 물론 한국은 독재국가가 아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최근 발표한 ‘2015 민주주의 지수’는 한국 민주주의가 갈수록 훼손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한국은 167개국 가운데 22위를 기록했다. 2014년보다 한 단계 떨어졌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는 1위다. 하지만 등위보다 중요한 것은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미흡한 민주주의’로 떨어진 점이다. 그 밑으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혼합형’, ‘권위주의’ 두 단계가 더 있지만 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서명운동이 민생살리기의 핵심이 아니라는 데 있다. 민생살리기는 사실을 왜곡하거나 호도하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을 겁박해서는 더더욱 안 될 일이다. 서명운동을 한다고 경제가 살아난다면 이를 마다할 시민이 어디 있겠는가. 나부터 서명 부스로 뛰어갈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박 대통령의 잘못된 인식과 공감능력 부재라고 생각한다. 박 대통령은 서명하면서 “얼마나 답답하시면 서명운동까지 벌이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얼마나 답답하시면…”이라는 박 대통령 표현의 주체는 이 운동을 펼치고 있는 재계다. 하지만 시민들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 천만명 서명운동’을 할 때나 쌍용차 해고자들이 장기간 고공농성을 벌일 때, 밀양 할머니들이 송전탑 반대운동을 했을 때 박 대통령이 이 화법을 활용했더라면 시민들의 반발이 이다지 거세지 않았을지 모른다. 시민을 편가르는 대통령의 ‘나쁜 습관’이 아쉬울 따름이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