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갑으로 살아온 사람의 당연한 선택 아닐까.” 최근 지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안대희 전 대법관이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 그가 4월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의 ‘험지 차출론’에 부응해 서울 마포 갑 예비후보로 등록한 직후였다. “대법관까지 한 사람이 뭐가 아쉬워 국회의원을 하려 할까” 하는 안타까움이 대화를 이끌었다. 결론은 “그거 아니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였다. 모두가 동의했다. 지인들과의 대화는 검사와 판사의 차이로까지 나아갔다. 결국 검사가 판사보다 정치적 야망이나 특권의식이 더 클 수 있다는 데 이르렀다.
평생을 갑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낮은 곳을 바라보지 않는다. 둘째, 갑이 되지 않으면 불안하다. 안 전 대법관만큼 이 조건에 맞는 이도 드물다. 서울법대 재학 중 약관 스무 살에 사법시험에 최연소 합격한 뒤 엘리트 검사 코스를 밟아 대법관까지 지낸 데다 비록 전관예우 시비로 6일 만에 낙마하긴 했지만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까지 받았다. 대법관 출신으로 국무총리를 거쳐 여당의 대선후보를 지낸 이회창에 비견될 정도다. 판·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 출신 국회의원이 직업군별로는 가장 많은 한국에서 대법관 출신이 정치하는 게 뭐 대수일까 여길 수도 있겠다. 국민 누구든 결격사유만 없다면 국회의원은 물론 대통령에 입후보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대법관의 정치참여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할까. 대법관의 정치참여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안 전 대법관이 새누리당의 험지 차출에 응하면서 “경선까지 하라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는 불만을 드러냈다고 한다.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할까. 남과는 다른 자신의 지위를 인정해 달라는 것 아닌가. 말하자면 특권의식의 발로이자, ‘영원한 갑질’의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오죽하면 “일국의 대법관까지 지낸 분이 국회의원이 되려고 유니폼을 입고 유세를 하고 있는 모습이 측은했다”(유시민 작가)는 말까지 나올까. 괜한 트집이나 정치공세가 아니다.
대법관이나 국무총리 후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엘리트 중에서도 정의감이 뛰어나고 신망이 두터워야 함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안 전 대법관도 정의감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기는 것이 정의”라는 승자의 정의일 뿐이다. 겉으로는 정의를 내세우고 속으로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영원한 갑질 행위나 다름없다. 그렇지 않다면 안 전 대법관은 여당이 아닌 야당을 선택해야 했다. 강자가 아닌 약자의 편에 서야 했다. 그의 시선은 낮은 곳, 즉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야 했다.
영원한 을도, 영원한 갑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영원한 갑을 추구하는 이들은 있게 마련이다. 한 번도 을이 돼 보지 못한 사람은 추락하는 이들의 날갯짓을 모른다. 가치 있는 생존은 더더욱 알 턱이 없다. 설이 다가오고 있다. 이번호 표지이야기로는 무너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담았다. 힘들지만 자신보다 낮은 곳을 바라보는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yang.com>
'이무기가 쓴 칼럼 > 편집실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집실에서31]거짓말 정부(2016.03.01ㅣ주간경향 1165호) (0) | 2016.02.24 |
---|---|
[편집실에서30]샌더스가 만드는 희망의 길(2016.02.23ㅣ주간경향 1164호) (0) | 2016.02.17 |
[편집실에서28]“얼마나 답답 하시면…“ 화법 유감(2016.02.02ㅣ주간경향 1162호) (0) | 2016.01.27 |
[편집실에서27]잘못 겨눈 풍자의 칼끝(2016.01.26ㅣ주간경향 1161호) (0) | 2016.01.20 |
[편집실에서26]용서 아닌 책임을 추궁해야 할 때(2016.01.19ㅣ주간경향 1160호) (0) | 2016.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