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다 보면 곳곳에서 당선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총선 이후 흔한 풍경이다. 흘끗 쳐다보며 총총걸음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손을 들어 화답하거나 미소를 보내는 이들도 있다. 당선자에게 달려가 악수를 청하는 적극 지지자들도 눈에 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승패를 떠나 입후보자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박수 받을 이들은 따로 있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심판과 야권 혁신에 대한 열망 표출이라는 절묘한 결과를 만든 유권자들이다. 이번 총선은 한마디로 ‘유권자 혁명’이라고 부를 만하다. 여야 정치인을 비롯해 국민 대다수는 ‘여소야대’ 구도를 예상하지 못했다. 여러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투성이다. 대통령은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을 이어가면서 반대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에게 총선은 ‘남의 일’이었고, ‘강 건너 불구경’이었을 뿐이다. 여야는 향후 대표를 비롯한 당직자 선출을 두고 볼썽사나운 계파싸움을 벌일 것이 눈에 선하다. 총선 민심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보다는 아집과 독단을 보이는 등 실망스런 행보를 보이는 데 대해 “총선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하는 푸념도 들린다. 반짝 주인이 됐다가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게 유권자들의 운명인가.
이 같은 민심 왜곡현상은 어쩌면 이번 총선이 낳은 불가피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총선 결과는 각 당이 유리한 쪽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겼다. 교차투표에서 드러난 표심은 분석해봐야겠지만 단순히 정당투표율을 놓고 본다면 그렇다. 제2당으로 전락하는 참패를 당한 새누리당은 여전히 1위다. 합리적 보수정당으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다. 정권 재창출 위기감은 보수세력 재결집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제1당에 올랐지만 정당투표율은 3위다. 경북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외연을 넓히는 데 성공했고, 정권 탈환 가능성을 높였다. 3당체제 정립에 성공한 국민의당은 정당투표율에서 더민주를 누르고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호남당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지만 캐스팅보트를 쥐게 됐다. 어느 당도 유불리를 따질 수 없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기회이자 위기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유명한 미국 프로야구선수 요기 베라가 한 말이다. 정치 일정을 야구에 비유하자면 총선은 1회이고, 내년 대선은 9회이다. 이제 1회를 마쳤다. 총선이 끝났다고 유권자의 역할이 끝난 게 아니라는 얘기다. 아직도 긴 레이스가 남아 있다. 저마다 20대 국회에 기대하는 바는 다를 것이다. 다름 속에서도 박근혜 정권 심판, 야권 혁신이라는 결과를 낳은 민심은 유효하다. 정치권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감시하는 역할은 유권자의 몫이다. 과연 공은 정치권으로 넘어갔는가, 여전히 유권자의 손에 있는가. 관심 있게 지켜보되, 조급하지는 말자. 값진 혁명의 성과를 도둑맞을 수는 없지 않은가. 유권자 혁명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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