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사임의 결정적 계기는 백악관 녹음테이프였다. 1972년 대선을 앞두고 터진 ‘워터게이트 스캔들’은 재선에 성공한 닉슨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이듬해 5월 시작된 의회의 워터게이트 청문회 중 닉슨이 집무실에서 한 대화나 전화통화를 녹음한 테이프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의회는 테이프 제출을 요구했지만 백악관은 국가안보 등을 이유로 거부했다. 지루한 공방은 1974년 7월 연방대법원의 공개 판결로 일단락됐다. 8월5일 공개된 테이프에는 ‘스모킹건(결정적 증거) 테이프’가 있었다. 스캔들 폭로 엿새 뒤인 1972년 6월23일 녹음된 것이다. 테이프에는 닉슨이 연방수사국(FBI)이 수사를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을 중앙정보국(CIA) 국장·부국장에게 요청하는 통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탄핵 사유가 되는 명백한 사법방해였다. 닉슨은 테이프 공개 나흘 뒤 사임했다.
미 대통령 중 집무실 대화를 처음 녹음한 이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자신의 말이 잘못 인용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녹음기는 집무실 전등갓과 책상 아래에 설치됐다. 1940년 8~11월 기자회견 내용을 녹음했다. 총 분량은 8시간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민감한 사안이나 의심스러운 인물들과 만날 때만 녹음을 했다. 분량은 5시간으로, 많지 않다. 케네디는 정확한 기록과 자서전 준비 등을 위해 녹음했다. 그 결과 총 260시간 분량의 테이프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상황(248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닉슨의 녹음 분량은 약 3400시간으로, 가장 길다. 전임자들과 달리 언제든 기록할 수 있는 녹음기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지난 8일(현지시간) 제임스 코미 전 FBI 국장의 상원 증언 이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코미의 대화를 담은 녹음테이프의 존재 여부가 주목받고 있다. 코미가 트럼프를 5차례나 ‘거짓말쟁이’라 하고, 백악관이 부인하면서 진실공방으로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녹음테이프가 있다면 누가 거짓말하는지 밝혀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과거 테이프의 존재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지만 백악관은 존재 확인을 거부하고 있다.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도 테이프와 그 내용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트럼프의 운명이 테이프에 달려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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