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29일 아침(현지시간), 미국 NBC방송의 간판 앵커 맷 라우어(60)의 해고 소식이 전해졌다. ‘부적절한 성적 행동’을 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라우어는 1952년 시작된 NBC 아침 뉴스·토크쇼 <투데이>를 21년 가까이 이끈 최장수 진행자였다. 그날 방송 첫머리에 동료의 해고 소식을 전해야만 했던 여성 공동 진행자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믿고 의지했던 동료가 성추행범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라우어는 지난 10월 중순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행 폭로를 계기로 시작된 ‘미투(나도 당했다)’ 캠페인으로 몰락한 유명인 중 한 명일 뿐이다.
자고 나면 두툼해지는 성추행범 명단에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93)이다. 사진을 찍을 때 “손으로 엉덩이를 슬쩍 더듬는” 나쁜 손버릇이 문제였다. 지금까지 7명이 비슷한 의혹을 제기했다. 고령에다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퇴임 대통령의 성추행이라니. 환하게 웃는 전직 대통령 얼굴 뒤에 음흉한 손이 감춰져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이제 그의 이름 뒤에는 성추행 대통령이라는 꼬리표가 죽어서도 따라다니게 됐다.
미투 캠페인 한 달 보름 새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추락했다. 케빈 스페이시, 더스틴 호프먼 같은 할리우드 스타와 유명 방송 진행자인 찰리 로즈도 성추문이 드러나 망신을 샀다. 코미디언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 앨 프랑켄과 하원의원 중 현역 최다선이자 민권운동의 대부인 민주당의 존 코니어스도 정치 생명에 위협을 받을 정도로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끄떡없는 한 사람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여성혐오 이슈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인물이 지난해 대선에서 당선됐다는 사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난해 대선을 코앞에 둔 10월,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의 음담패설 테이프를 공개했다. 2005년 NBC 프로그램 <액세스 할리우드> 진행자 빌리 부시와 나눈 대화가 담겼다. 트럼프는 “당신이 스타라면 여성들의 그곳을 움켜쥘 수 있다”고 했다. 유명인에게는 여성을 성추행·성폭행 할 권리가 있음을 자랑했으니 파문이 클 수밖에 없었다. 여성계는 반발했고, 트럼프의 지지율은 추락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당선됐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지금까지 트럼프의 성추행을 정식으로 문제 삼은 여성은 13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여기에는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로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포함돼 있지 않다. 트럼프는 이들의 주장을 ‘가짜뉴스’라고 일축했다. 증인과 증거가 있는 데도 말이다. 트럼프는 왜 이리도 당당한 걸까. 트럼프는 대선 승리를 면죄부로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성추행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줬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면 오산이다. 그의 당선은 남성 우월주의가 지배하는 미국 정치문화와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남성 유권자들의 비호감, 트럼프에 대한 백인 저소득층의 기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뿐이다. 만약 미투 캠페인이 1년 전에 시작됐어도 트럼프는 당선될 수 있었을까. 운이 좋았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겉으로는 성추행 문제에 태연자약한 척하지만 트럼프가 속으로 유독 신경 쓰는 일이 있다. 공화당 후보 로이 무어(70)의 성추문 파문 속에서 오는 12일 치러지는 앨라배마주 연방 상원의원 보궐선거다. 트럼프에 대한 중간평가인 내년 중간선거의 풍향계가 될 수 있어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패배할 경우 트럼프와 공화당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이었던 스티브 배넌을 비롯한 지지자들은 무어 후보 지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편으로는 비뚤어진 성 의식과 남성 우월주의, 가부장제에 사로잡힌 미국 사회에 대한 심판이라 할 수 있다. 미투 캠페인으로 제기된 성 평등 의식에 대한 중간평가인 셈이다.
민주당은 앨라배마에서 선거혁명을 이루기 위해 막대한 선거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공화당도 비록 텃밭이긴 하지만 성추문 파장이 커 결과를 쉽게 낙관하지 못하고 있다. 무어 후보는 14세 소녀를 비롯해 여성 9명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더욱이 무어 후보는 공화당 지도부의 후보 사퇴 종용에도 요지부동이다. 어쩌면 그도 지난해 트럼프처럼 유권자의 심판을 면죄부로 삼으려는 심산인지도 모른다. 시대는 바뀌었다. 젠더 감수성이 요구되는 시대에 남성 우월주의에 근거한 성 왜곡 문화는 더 이상 용인되지 않는다. 앨라배마 주민들은 왜곡된 성 문화가 지배하던 추악한 어둠의 역사를 자신들의 손으로 지울 수 있을까.
국제·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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