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밀러 백악관 선임고문을 해임하라.”
지난 11월 18일(현지시간) 미국 시민권 단체 50여 곳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밀러의 해임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사흘 뒤인 21일에는 120명이 넘는 민주당 상·하원의원들이 같은 내용의 서한을 백악관에 전달했다. 다음 날에는 유대인 연합단체가 밀러 해임 촉구에 동참했다. 왜 이들은 한목소리로 밀러의 해임을 촉구한 걸까.
발단은 밀러의 e메일이다. 지난 11월 12일 미국 시민권 단체 ‘남부빈곤법률센터(SPLC)’가 밀러가 백악관에 몸을 담기 전인 2015년 3월부터 2016년 6월까지 15개월간 극우 온라인 매체 <브레이트바트 뉴스>에 보낸 900여 건의 e메일을 공개했다. 밀러의 e메일은 그가 오랫동안 극우민족주의와 관련이 있었고, 이민자를 혐오하는 인종주의자라는 사실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11월 25일에는 SPLC가 이민자와 증가하는 범죄와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과 다른 내용의 e메일을 추가 공개했다. 백악관과 공화당은 침묵하고 있지만 밀러 e메일이 일으킨 파문은 진행 중이다.
밀러는 알려진 대로 트럼프 이민정책의 설계자다. 만 34세에 불과하지만 트럼프 행정부 원년 멤버로 자리를 지키며, 사위 재러드 쿠슈너(38)와 함께 트럼프가 가장 총애하는 참모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e메일 파문으로 그는 백악관 입성 이후 최대 위기에 빠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민정책의 설계자인 스티븐 밀러 백악관 선임고문. 밀러는 이민자를 혐오하는 인종주의자임을 보여주는 e메일 누출로 사임 압력을 받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인종차별주의자 민낯 드러낸 e메일
밀러의 e메일의 실체는 <브레이트바트 뉴스>의 전 기자 케이티 맥휴가 밀러와 주고받은 e메일 900여 건을 SPLC가 운영하는 블로그 ‘헤이트워치’에 제공함으로써 드러났다. 2014년 4월~2017년 6월 <브레이트바트 뉴스>에서 에디터로 일한 맥휴는 반무슬림 트윗을 올렸다가 해고된 뒤 극우를 포기했다. <브레이트바트 뉴스> 에디터들이 2015년 밀러를 자신에게 소개해줬다고 밝힌 맥휴는 “밀러가 보내준 이메일 내용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이 됐다”고 헤이트워치에 말했다.
밀러의 e메일을 분석한 헤이트워치도 “밀러가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정책 설계자로서 만든 밀입국 이민자에 대한 체포 쿼터 설정, 무슬림국가 시민의 입국금지 행정명령, 불법이민자 가족분리 수용 같은 정책들을 뒷받침하는 극단주의적 반이민 이데올로기를 보여준다”고 밝혔다. e메일의 80% 이상이 인종이나 이민과 관련된 내용이다.
헤이트워치에 따르면 밀러는 약 30년간 백인우월주의자로 활동해온 재러드 테일러가 발행해온 잡지 <아메리칸 르네상스>와 웹사이트 암렌(AmRen)의 인종 간 범죄와 관련한 기사에서 정보를 얻으라고 맥휴에게 지시했다. NPR 방송에 따르면 암렌은 백인우월주의자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대변자지만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밀러는 또 다른 백인우월주의자 웹사이트 VDARE에 실린 2015년 중남미와 미국을 강타한 허리케인 패트리샤 관련 기사를 맥휴에게 보냈다. 그 후 두 사람이 허리케인이 미국으로 난민을 유입할 수 있다는 대화를 나눴다. 밀러는 또 맷휴에게 1970년대 이민자에 의해 유럽 문명이 파괴된다는 내용을 다룬 프랑스 소설 <성자들의 캠프>에 관한 글을 써볼 것을 제안했다. 이 책은 백인민족주의자 그룹에 중요한 영감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밀러는 아마존이 백인우월주의를 상징하는 남부연합기 판매를 금지하자 이에 분개하는 내용, 아돌프 히틀러가 칭송한 우생학에 기반을 둔 이민법을 지지하는 내용, 난민 재정착이 미국의 주권과 문화를 말살하려는 계획의 일부분이라는 음모론을 전파했다.
종합하면 밀러의 e메일은 밀러가 백인우월주의자와의 연결고리이자 트럼프의 인종차별적 이민정책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보여주는 통로라 할 수 있다. 보수 진영에서는 SPLC가 좌익단체라는 점을 들어 e메일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그의 해임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스티븐 밀러가 백악관에 머무는 매일매일이 위기”라는 트윗을 올렸다. 스테파니 그리샴 백악관 대변인은 민주당 의원들의 해임 촉구에 대해 SPLC는 “완전히 신뢰할 수 없고 오랫동안 잘못됐음이 드러난 극좌 중상모략 조직”이라고 선을 그었다. 호건 기들리 백악관 부대변인은 밀러에 대한 비판은 그의 유대인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유대인 연합단체는 11월 22일 “백악관이나 미국에 백인우월주의자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분명히 하기 위해” 밀러를 해임할 것을 트럼프에게 촉구했다.
11월 12일(현지시간) 스티븐 밀러의 e메일을 폭로한 시민권 단체 남부빈곤법률센터(SPLC) 블로그 ‘헤이트워치’의 안내문. / SPLC 웹사이트 캡처
■어떻게 트럼프 이민정책 설계자가 됐나
밀러의 이민관은 그가 지난 8월 <워싱턴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밝힌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민은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현안이다. 이민은 보건의료제도·교육제도·공공안전·국가안보·경제·금융제도에 영향을 미친다. 이민의 목표는 우리 사회의 활력과 단결과 단란함과 견고성을 높이는 이민제도를 만드는 데 있다.”
밀러가 트럼프의 이민정책에 관여하게 된 계기는 트럼프 행정부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제프 세션스 상원의원과의 인연 때문이다. <허핑턴포스트> 11월 22일자 기사에 따르면 2013년 당시 세션스 의원은 미 이민정책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는 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이민을 주제로 참모들과 대화를 즐겼다. 그때 두각을 드러낸 이가 공보국장 밀러였다.
두 사람 모두 이민제한주의자였지만 밀러가 히스패닉에 대한 인종적 차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데 비해 세션스는 경제적인 이유에서 이민제한을 찬성했다는 점에서 입장차이가 난다. 두 사람의 합작품이 2015년에 나온 25페이지짜리 이민 지침서다. 이 지침서에서 밀러는 1924년 존슨-리드법에 대해 “임금을 인상하고 동화가 이뤄지고 중산층이 탄생하도록 이끌었다”고 찬양했다. 물론 이 지침서는 2016년 트럼프 대선 캠페인 때 이민정책의 기초 자료로 활용됐다.
밀러는 그동안 합법적 이민을 허용해온 미 이민 역사의 큰 물줄기를 이민제한 쪽으로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민자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의 이민에 대한 생각은 “(미국은) 박해받은 자들의 망명지”(조지 워싱턴), “(이민자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가장 무시당한 바보들”(벤저민 프랭클린)이라고 할 만큼 미 창시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라질 정도였다. <디바이딩 라인스>를 쓴 미 작가 대니얼 티치너는 “과거에는 이민자를 사랑했고, 지금은 이민자를 두려워한다”고 표현했다고 <허핑턴포스트>는 전했다.
이민제한을 처음 법제화한 것이 1882년 중국인 배제법이다. 1924년 존슨-리드법은 그동안 관대했던 이민자에 대한 입국을 제한하는 조치였다. 이 조치로 해외에 있는 미국 영사관으로부터 비자를 취득한 사람만 미국으로 올 수 있었다. 사실상 유럽 이민자를 겨냥한 법이었다. 나치 정권의 유대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존속해온 이 법은 1965년 하트-셀러법으로 대체됐다. 비로소 ‘미국이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게 된 것으로 평가받는 이 법은 인종에 따른 쿼터를 없애고, 유럽 이외의 국가로부터 오는 이민자를 실력 본위로 받아들이는 게 골자다. 이 법 도입으로 이민자 숫자는 1965년 960만 명에서 2015년 4500만 명으로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이 가운데 90%가 유럽 출신이 아니다.
밀러의 이민정책들은 미 이민의 기본으로 자리 잡은 하트-셀러법을 뒤흔든 것이다. 반이민 싱크탱크 이민연구센터의 선임연구원 스티븐 카머로타는 <워싱턴포스트>에 “밀러는 이민 토론을 불법 이민자의 역경보다는 무엇이 미국에 최대 이익이 되는지에 맞추는 데 큰 역할을 했다”면서 “당신이 대통령이라면 이를 믿을 수 없을 만큼 소중히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
밀러는 고교 시절 이민 문제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다. 밀러는 지난 8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그 이유로 “당시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당장 폭발할 것 같은 주제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밀러는 “모든 친척이 리버럴 민주당원이었다”면서 “보수주의자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또 고교 시절 “역사와 정부 과목이 애국심을 저해하고 공유된 미국의 정체성을 증진하는 데 실패했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대들기도 했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월 8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대국민 TV 연설을 통해 멕시코 국경장벽 예산을 편성해줄 것을 의회에 요청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국토안보부 산하 이민기구 장악
트럼프 행정부의 주요 이민정책은 밀러의 머리에서 나왔지만 밀러 혼자 힘으로는 추진할 수 없었다. 조력자들이 필요했다. <허핑턴포스트> 11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이민을 관장하는 국토안보부 산하 시민이민국(CIS)의 강경파 그룹이 그들이었다. 존 켈리 당시 국토안보부 장관의 선임고문 진 해밀턴과 프랜시스 시스나 CIS 국장, 시스나의 후임인 켄 쿠치넬리 CIS 국장대행 등이 대표적인 인사들이다.
해밀턴은 국토안보부에서 밀러의 ‘무시무시한 칼’로 불렸다. 시스나는 ‘이민법의 백과사전’, ‘완벽한 이민 괴짜’로 불렸다. 한 국토안보부 직원은 “만약 그에게 이민국적법 468페이지 두 번째 단락이 뭔지 물어보면 그대로 인용할 것”이라며 찬탄했다고 <허핑턴포스트>는 전했다. 버지니아주 검찰총장을 지낸 쿠치넬리는 시스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버지니아주 상원의원 시절 그는 고용주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노동자를 해임할 수 있는 제안을 도입하기도 했다. 미 하원 국토안보위원회 버니 톰슨 위원장은 쿠치넬리를 “반이민 비주류 인사이자 트럼프 아첨꾼”이라고 비판했다.
국토안보부 내 이민제한주의자들의 목표는 ‘이민 길’ 차단이었다. 합법적이냐 불법적이냐, 난민이냐 정치적 망명자냐는 것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켈리 장관 때문에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밀러는 켈리 장관이 2017년 7월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옮기고 나서야 국토안보부 산하 이민기구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밀러는 이민자의 입국비자 사기방지와 퍼블릭차지 규정 도입, 망명신청자 규정 강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비자 사기방지를 위한 조치로 이민 관련 서류양식은 늘어났고, 비용은 올랐으며, 발급시간은 지체됐다. 저소득층 식비 지원제도인 푸드 스탬프, 저소득층과 장애인 의료보험제도인 메디케이드, 주택보조금을 제외하려는 새로운 ‘퍼블릭차지’ 규정 도입은 트럼프 이민정책 중 가장 야심작이다. 이 규정이 도입되면 가난한 유색인종의 이민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5월 24일 시스나를 해임하고, 후임에 쿠치넬리를 앉힌 것은 이 일이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치넬리는 최근 국토안보부 부장관대행으로 승진했다. 망명 신청자 규정 강화로 11만 명이던 연간 난민수용자는 2017년 4만5000명, 현재는 역대 가장 적은 1만8000명으로 급감했다.
밀러의 이민정책은 다양하게 입법화됐지만 반대 여론과 연방 법원에 막혀 번번이 뒤집혔다. 트럼프가 건설하겠다고 밝힌 멕시코 국경장벽도 집권 이후 신설된 곳은 전혀 없다. 이민은 재선에 도전하는 트럼프의 가장 중요한 정책이다. 하지만 밀러의 이민정책에 대해 트럼프가 만족하는 것만은 아니다. 지난해 봄 도입한 가족분리정책, 취임 직후의 무슬림 국가 시민의 입국 금지 조치가 실패했을 때 트럼프는 밀러에 불만을 드러냈다. 보수 성향 매체 <워싱턴 이그재미너>의 칼럼니스트 타니아 로우는 밀러의 이메일이 누출된 11월 12일 칼럼에서 밀러가 이민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굽히지 않아 공화당의 주요 정책들이 위협받게 됐다면서 그의 해임을 주장했다. 트럼프의 재선 가도에 이민정책이 미칠 영향에 따라 밀러의 정치 운명도 좌우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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