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5일(현지시간) 미국의 몇 개 주에서 실시된 지방선거는 내년 대선을 1년 앞둔 시점이어서 ‘대선의 풍향계’로 주목받았다. 민주당이 켄터키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하고, 버지니아주 상·하원을 모두 장악한 뉴스가 머리기사를 장식했지만 이것 못지않게 의미 있는 결과가 시애틀 시의원 선거에서 나왔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회사 아마존이 지원한 후보에 맞서 승리한 크샤마 사완트 의원(46)이 그 주인공이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회사 아마존이 지원한 후보와 맞서 승리를 거둔 크샤마 사완트 미국 시애틀 시의원. 사완트가 지난 11월 5일(현지시간) 시의원 선거 당일 시애틀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사회주의자인 사완트의 승리는 골리앗을 이긴 다윗에 비유됐다. 하지만 승리에 도취할 여유가 없다. 아마존·페이스북과 같은 거대기업을 만든 0.1%의 억만장자들이 대선 공약으로 ‘부유세’를 내건 엘리자베스 워런·버니 샌더스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세계 14번째 갑부인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77)이 중도주의자라는 이점을 내세워 민주당 경선에 가세함으로써 돈으로 선거를 사려는 ‘금권정치’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비록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블룸버그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다면 내년 대선은 도널드 트럼프와의 억만장자 간 대결이 된다. 억만장자들이 막대한 선거자금 지원을 무기로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면 99.99%를 대변할 진보 및 중도 후보들이 설 자리가 줄어들고, 경제적 불평등의 골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인두세’ 추진 시의원에 반발한 아마존
시애틀 시의원 선거에서 값진 승리를 거둔 사완트는 ‘시간당 최저임금 15달러 도입’의 주역으로 유명한 여전사다. 2013년 사회주의자로서는 136년 만에 시애틀 시의원에 당선됐다. 그때 내건 공약이 ‘시간당 최저임금 15달러로 인상’이었다. 이 안은 이듬해 시의회에서 통과돼 시애틀을 미국 최초로 최저임금 15달러 도시로 만들었다. 사완트는 인도 태생이다. 뭄바이대에서 컴퓨터과학을 공부한 그는 결혼한 뒤 미국으로 이민을 가 진로를 바꿔 사회주의 경제학자가 됐다. 2010년에야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한낱 지방도시의 시의원 선거가 전국적인 관심을 끈 건 아마존 때문이었다. 아마존은 기업친화적인 후보 당선을 위해 이번 선거에 시애틀상공회의소가 운영하는 정치자금 모금단체(CASE)에 145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는 CASE가 이번 선거 때 모금한 270만 달러의 절반을 넘는 규모다. 특히 아마존이 기부한 금액은 4년 전 선거 때 이 단체에 기부한 2만5000달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액수다. CASE는 이 가운데 3분의 1에 가까운 44만3000달러를 사완트 낙선을 위해 투입했다. 지역지 <시애틀타임스>는 이번 선거를 “시애틀 시의회에 아마존 같은 기업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국민투표”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세계 최고 부자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왼쪽)와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도전을 선언한 억만장자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 APAFP연합뉴스
아마존은 왜 이번 선거에 거액의 선거자금을 기부했을까. 지난해 5월 연수익 2000만 달러가 넘는 기업에 종업원 1인당 275달러씩 모두 4500만 달러의 ‘인두세’를 거둬 심각한 주택난 해소에 활용하려는 조례를 시의회에서 철회시킨 경험 때문이었다. 사완트가 이끄는 시의회는 지난해 4월 아마존·스타벅스를 비롯한 시애틀에 있는 거대기업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인두세’를 도입하는 조례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하지만 4주 뒤인 막강한 자금을 동원한 아마존을 비롯한 기업들의 역공에 밀려 이 조례를 철회했다. 아마존은 인두세 저지 경험을 바탕 삼아 시의회를 장악하면 부를 빼앗으려는 비슷한 시도를 차단할 수 있다고 믿어 거액을 지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존의 선거 개입은 역풍을 맞았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이자 세계 최고 부자인 제프 베이조스(55) 같은 억만장자들에게 부유세를 부과하려는 워런·샌더스가 아마존의 선거 개입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사완트 지지에 나섰다. 샌더스는 선거 전날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제프 베이조스와 아마존은 선거를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아마존은 돈으로 민주주의를 살 수 없고 그들의 탐욕은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자. 나가서 투표하라”고 썼다. 워런도 지난 10월 19일 트위터에 “(아마존이) 시애틀 시의원 선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하려고 힘쓰고 있다. 나는 끝까지 아마존과 맞서는 시애틀 시의회와 활동가들과 함께한다”는 글을 올렸다. 결국 아마존이 지원한 7명의 후보 가운데 2명만 당선되고, 5명은 낙선했다.
사완트는 승리가 확정된 지난 11월 9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선거 결과는 억만장자 계급과 부동산 기업, 기득권층에 대한 거부”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선거는 인두세에 대한 국민투표라며 내년 새 의회에서 이 정책을 재추진하겠다고 했다. <로이터통신>은 아마존 측이 선거 결과가 나오기 전인 지난 11월 6일 “새로 구성될 시의회와 협력할 것이며, 더 많은 건설적인 대화가 열려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지만 선거 결과가 나온 이후에는 일절 응대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진보 성향 주간지 <네이션>은 “더 많은 기업의 돈이 지방선거에 투입될수록 진보 후보는 패배할 것”이라면서 “선거자금 개혁론자들이 지방선거에 기업이나 특정 이익집단의 과도한 돈이 투입되는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게 이번 선거의 교훈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워런·샌더스 ‘부유세’에 화난 억만장자들
미 CNBC 방송은 지난 9월 26일 월스트리트와 대기업의 민주당 후원자들은 워런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면 대선을 위한 정치자금 기부를 중단하거나 심지어 트럼프를 지지할 의사를 가진 것으로 자체 조사결과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트럼프 탄핵조사 돌입 이후 워런이 민주당의 선두주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을 제치고 대선후보가 될 모멘텀을 얻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워런은 지난달 여론조사에서 바이든을 제치고 선두에 오른 적이 있다. 11월 13일 현재 정치여론조사 결과를 집계하는 미 정치분석매체 <리얼클리어폴리틱스>(RCP)에 따르면 전국 지지도는 여전히 바이든(26.0%)이 워런(20.8%)과 샌더스(17.8%)를 앞서고 있다.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35)는 지난 7월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워런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온라인 매체 <버지>가 입수해 지난 10월 공개한 녹취록을 보면 저커버그는 거대 기술기업의 독점을 깨기 위해서는 반독점법을 활용하겠다는 워런의 비전에 대해 “만약 누군가가 존재론적인 위협을 가하려고 한다면 지든 이긴든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연방 상원의원인 조 맨친은 워런이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면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억만장자들이 워런뿐만 아니라 샌더스에게 전면전을 선포한 이유는 그들이 공약으로 내건 ‘부유세’ 때문이다. 샌더스는 지난 9월 24일 부유세 공약을 발표했다. 3200만~5000만 달러에 1%를 부과하는 것을 비롯해 재산을 8단계로 분류해 100억 달러 이상 8%까지 부유세를 매겨 10년간 4조3500억 달러를 거둬들이겠다는 구상이다. 대상자는 18만 가구다. 샌더스에 앞서 워런은 지난 7월 5000만 달러 이상에는 2%, 10억 달러 이상에는 3%의 부유세를 부과해 10년 동안 2조6000억 달러 세금을 걷겠다고 밝혔다. 대상자는 7만 가구다. 두 사람은 부유세로 조성된 재원은 주택 건설, 전국민 건강보험, 학비 융자금 탕감, 양육비 지원, 공립대 학비 무료 등 새로운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사용할 계획이다.
샌더스와 함께 부유세 공약을 만들어온 경제학자들은 샌더스의 부유세가 실현되면 15년 안에 전형적인 억만장자들의 부를 절반으로 줄일 것이라고 지난 9월 24일 <뉴욕타임스>에 밝혔다. <포브스> 기준으로 지난해 재산이 1600억 달러인 아마존 CEO 베이조스의 경우 부유세가 실행될 경우 줄어들 재산 규모는 워런 안의 경우 870억 달러, 샌더스 안의 경우 43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산됐다. 지난해 기준으로 9430억 달러인 미 부자 15명의 경우 워런 안으로 4340억 달러, 샌더스 안으로 1960억 달러가 줄어들 것으로 분석됐다.
샌더스는 “나는 억만장자들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 제안은 억만장자들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들이 가진 많은 부를 없애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억만장자들은 이 말을 존재론적 위협을 느낄 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샌더스와 워런뿐만 아니라 바이든, 카멀라 해리스, 톰 스테이어 같은 경선 후보도 억만장자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평소 억만장자를 비판해온 로버트 라이시 전 노동부 장관은 지난 10월 16일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대공황 이후 이렇게 많은 대선후보가 부자들을 강력히 비판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억만장자들이 느끼는 실질적 위협은 <포브스>가 지난 8월에 조사해 보도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민주당 억만장자 기부자 23명을 대상으로 선호 후보를 조사한 결과 피트 부티기그는 23명 전원의 지지를 받은 반면 워런을 지지한 이는 3명에 불과했다. 샌더스는 단 한 명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뉴욕타임스>는 “두 사람의 부유세 안은 의회를 통과해야 효력을 발휘하는데, 현실적으로는 민주당이 내년 선거에서 상원을 장악해야 가능하다”면서 “워런의 안은 헌법에 맞는지, 어떻게 실행에 옮길지, 예상대로 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지 등 많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2020년 미국 대선의 민주당 경선후보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지난 11월 11일 뉴햄프셔주 엑시터 고교에서 열린 타운홀 미팅 중 연설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블룸버그, 미 대선 금권정치 논란 불 지펴
지난 11월 7일 뉴욕 시장을 3번이나 지낸 억만장자 마이클 블룸버그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는 미 대선 때마다 타의, 주로 언론에 의해 출마 후보로 이름이 거론됐지만 직접 출마를 선언한 것은 처음이다. 올해 3월만 해도 그는 트럼프를 이길 후보를 선출하도록 돕겠다고 밝힌 터였다. 그가 출마로 방향을 돌린 것은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스캔들’에 휘말린 선두주자 바이든 후보의 낙마 가능성 때문으로 보인다.
11월 기준으로 블룸버그의 재산은 571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에서는 9번째, 세계에서는 14번째로 돈이 많다. 또한 세계 최고 자선사업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미 대통령과 유엔 사무총장, 세계은행 총재와 더불어 ‘최고의 4대 직업’으로 꼽히는 뉴욕시장을 3번이나 지냈다.
그런 그는 왜 대선에 출마하려 할까. 진보 성향의 잡지 <뉴리퍼블릭>은 11월 11일 ‘블룸버그가 출마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기사에서 “그는 대표적인 중도주의자로서 입지를 굳혔다”며 “극단화되고 당파주의에 빠진 미 정가에서 블룸버그의 장점은 돋보이는 게 사실”이라고 분석했다. 블룸버그의 정치 이력을 보면 2001년 뉴욕시장에 출마하기 전까지 민주당이었다. 공화당으로 옮긴 그는 뉴욕시장에 당선돼 두 번은 공화당으로, 한 번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2018년 다시 민주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그럼에도 ‘철새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보다는 중도주의자 이미지가 더 강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나이를 감안하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개인적인 욕심이 출마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로서는 “트럼프도 하는데, 그보다 더 돈도 많고 정치적으로도 성공한 내가 못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법도 하다. 호사가들이야 그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돼 트럼프와의 맞대결을 기대할지 모르지만 현실적인 벽은 높다. 블룸버그의 지지율은 민주당 경선 후보 가운데도 낮은 4~6% 정도다. 블룸버그는 2008년, 2012년 대선 때도 주변의 부추김에 의해 출마를 저울질하다 포기한 적이 있다. 블룸버그가 출마를 선언한 다음 날 CNN 방송 기사 제목 중 하나는 ‘자료를 최고로 신뢰하는 마이클 블룸버그가 자료를 무시하고 있다’였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에 하나 대선 티켓을 잡는다 하더라도 금권정치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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