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A씨는 회사 대표 의견에 토를 달았다는 이유로 시말서를 썼다. 대표는 시말서 내용을 직접 불러주면서 거부하면 징계하고 연봉을 삭감하겠다고 협박했다. B씨는 업무시간에 간식을 먹고 휴대폰을 봤다는 이유로 시말서를 강요당했다. 사장은 시말서에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고 쓰도록 했다. C씨는 상사가 A4 3장에 자신의 잘못을 적어와 그대로 써서 제출할 것을 강요받았다. D씨도 사소한 업무 실수로 경위서를 썼다. 그런데 경위서를 제출하면 상급자가 빨간펜으로 긋고 다시 써오라고 계속 반려했다. 용역업체 직원 E씨는 경위서를 두 번 작성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직장갑질119가 25일 공개한 ‘시말서 갑질’은 다양했다. 올해에만 9월까지 시말서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모욕을 받고, 징계·해고당한 사례는 143건이나 된다. 시말서의 사전적 의미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적은 문서’다. ‘일이 벌어진 경위를 적은 서류’를 뜻하는 경위서와 비슷하다. 하지만 두 문서의 결정적 차이는 경위서엔 ‘반성’ 의미가 없고, 시말서엔 반성과 함께 그에 따른 징벌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립국어원이 경위서로 순화해 사용하라고 했지만 여전히 현장에서 시말서가 활용되고 있는 이유다.
시말서 갑질 사례 대부분은 대법원 판례나 고용노동부의 ‘직장 내 괴롭힘 매뉴얼’에 위배된다. 대법원은 1995년에 ‘시말서 O회 제출 시 해고’가 가능하도록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에 명시했더라도 이를 근거로 해고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2010년에는 시말서가 사죄문이나 반성문을 의미한다면 헌법상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결했다. 고용노동부는 반성문 강요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명시하고 있다.
회사에서 시말서를 강요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법원 판례에 따라 거부하면 된다. 취업규칙 등에 경위서를 제출하도록 돼 있다면, 육하원칙에 따라 사실관계만 쓰면 된다. 경위서라는 제목으로 사실관계를 쓰더라도 상사가 반성·사과·재발방지·처벌 등의 단어를 강요하다면, 대법원 판례와 근로기준법에 위배돼 거부하면 된다. 직장갑질119가 내놓은 대처법이다. 대법원 판결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후에도 여전히 억압적인 시말서가 남아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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