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함정에서 가혹행위와 괴롭힘을 당한 병사가 부대 지휘관의 방치 속에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하다 전입 4개월여 만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의혹이 7일 제기됐다. 최근 공군과 해군 성폭력 피해 여성 부사관들의 잇단 죽음으로 군의 허술한 대응이 드러난 데 이어 또다시 군 내 인권침해가 확인된 것이어서 충격을 더하고 있다. 이번 사건 역시 여성 부사관 사망 사건에서 드러난 초동 대응 부실과 2차 가해 등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군의 허술한 대응에 할 말이 없다.
군인권센터 발표를 보면 사건 발생 후 함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대응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해군 3함대 소속 강감찬함의 정모 일병은 지난 2월1일 부대 배속 열흘 만에 아버지 간호를 위해 신청한 청원휴가를 다녀온 뒤부터 상급자들로부터 폭력과 따돌림을 당했다. 하지만 함장은 정 일병이 폭행 당일 밤 피해를 신고했음에도 가해자들과 분리조치를 하지 않았다. 정 일병은 그 후 자해를 시도하고 다시 함장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함장은 분리하기는커녕 오히려 가해자들을 불러 사과하라고 했다. 명백한 2차 가해이다. 함장은 정 일병이 공황장애 등 불안증상을 보이자 그제서야 하선시켰다. 첫 폭행이 이뤄진 지 20일 만이었다. 민간병원에서 두 달여 치료받고 퇴원한 뒤 휴가 중이던 정 일병은 지난 6월18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군 수사기관의 사후 대응도 터무니없다. 담당 군사경찰대는 유가족에게 중간수사 브리핑을 하면서 휴대전화 포렌식 결과 입대 전 자해 시도 등이 식별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제의 핵심을 조사하는 것은 고사하고, 사건과 무관한 내용을 전해 유가족의 상처를 키웠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군이 문제의 함장 등 가해자들을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은 채 해외로 파병했다는 점이다. 군은 정 일병 사망 열흘 뒤 이들을 청해부대로 파견했는데, 이 때문에 지금껏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죽음도 막지 못하고 사후 대응도 부실하다.
무고한 병사가 목숨을 잃은 것도 모자라 군이 진상을 무마하고 덮는 식의 대응이 반복되고 있다. 성추행 피해자의 잇단 죽음에서 군은 도대체 무엇을 배운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군은 최소한의 자정능력과 자존심도 없나. 이번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관련자에 대한 엄정한 문책이 있어야 한다. 군 지휘부는 이 악순환의 꼬리를 끊을 방안을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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