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들은 오고 가지만 연방대법원은 영원하다.” 미국 27대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의 이 정의보다 미 연방대법원을 잘 설명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최장 8년인 대통령 임기에 비해 종신직인 연방대법관을 부러워하는 것만은 아니다. 행정부(대통령·부통령), 입법부(상·하원의원)처럼 선출직은 아니지만 미국인이 가장 신뢰하는 헌법기관이어서다. 판례로 사회적으로 민감한 현안의 방향을 결정하는 영미법계의 전통에서 연방대법원의 위상은 도드라진다. 간혹 정치적 논쟁에 휘말리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연방대법원이 정의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지는 이유다. 흑인 민권운동의 도화선이 된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1954년), 낙태권을 기본권으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1973년) 판결 등 숱한 판결들이 미국 사회의 물줄기를 굽히고 폈다.
그런데, 이런 연방대법원의 위상을 뒤흔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기로 결정한 판결문 초안이 언론에 유출돼 전 미국이 논란에 휩싸였다. 초안과 현재의 연방대법관 구성(보수 6, 진보 3)을 보면 연방대법원은 50년간 유지해온 낙태권을 파기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낙태권을 반대하는 보수파는 즉각 초안을 지지했지만, 민주당의 조 바이든 대통령은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진보와 보수로 갈린 미국 내 갈등이 한층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연방대법원 판결문 초안이 유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심리 내용이나 판결 결과가 사전에 알려진 경우는 전에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로 대 웨이드 판결 내용은 두 차례 유출됐다. 1972년 6월 한 연방대법관이 동료에게 쓴 메모가 워싱턴포스트에 의해, 이듬해 1월엔 판결 내용이 주간지 타임에 미리 보도됐다. 후자는 제작 편의를 위해 판결 결과를 미리 알려준 것이었는데, 당일 재판이 지연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다. “기자와 20초 이상 대화한 사실이 발각된 재판연구원(로클럭)은 해임한다”는 ‘20초 규칙’이 만들어진 게 이때다.
지난해 연방대법원에 대한 신뢰도(갤럽 조사)는 40%로, 2000년 이후 가장 낮았다.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이 유출 경위 조사를 지시했다. 누가 무엇을 위해 한 일이건 연방대법원에 대한 불신은 불가피해졌다. 그 피해자는 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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