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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여적

[여적] 감염병 대통령의 퇴장(220824)

2020년 봄 정체 모를 감염병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쳤을 때, 전 세계인은 혜성처럼 등장한 한 사람에게 주목했다. 자그마한 체구에 백발이 희끗한 이 남자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함께 백악관 브리핑실에 나타날 때마다 세계인의 이목이 쏠렸다. 사적모임 금지나 손씻기 등 기본 방역지침에서 백신 개발에 이르기까지 코로나19 대응책이 이 사람으로부터 나왔다. ‘감염병 대통령’이라는 별칭이 자연스럽게 붙었다.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82)이다. 

파우치 소장은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에는 무명인사나 다름없었다. 트럼프조차 코로나19 태스크포스를 꾸리기 전까지 그를 만난 적이 없었을 정도다. 하지만 그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전염병 대응 역사의 산증인이다. 코로나19뿐 아니라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에볼라 등 인류를 괴롭힌 전염병 대응 최전선에는 늘 그가 있었다. 파우치 소장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AIDS 대응 때였다. 파우치는 1984년 자신을 NIAID 소장에 임명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향해 AIDS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며 적극 대응을 건의했다. AIDS 퇴치에 대한 그의 집념은 AIDS 긴급구호계획으로 결실을 맺었다. 2003년 시작한 이 계획은 지금까지 단일 질병으로는 천문학적 금액인 1000억달러가 투입돼 2100만명의 생명을 구했다. 파우치 자신이 꼽는 인생 최고의 성취다. 트럼프와 보낸 1년은 파우치에게 최대 위기였다. 초기에는 마스크를 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 등 그 자신이 실수도 했다. 하지만 파우치 덕분에 트럼프의 비과학적·정치적 방역에 따른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파우치가 오는 12월 은퇴한다고 밝혔다. 그가 소장직을 맡은 38년 동안, 7명의 대통령이 거쳐갔다. 전문가로서의 소신과 열정, 당파를 초월한 소통 능력과 정무 감각 등이 남다른 장수의 비결로 거론된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그를 "헌신적인 공복"이었다며 “미국인의 삶에 감동을 줬다”고 치하했다. 파우치는 “정력과 열정이 있는 동안 또 다른 경력을 쌓고 싶다”고 했다. 전염병 대응의 요체가 과학과 전문가의 의견 존중이라는 대원칙을 유산으로 남긴 그의 인생 2막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