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세 번째 여성 총리 리즈 트러스(47)가 지난 20일 사임을 발표하면서 최단명 총리라는 불명예를 남기고 퇴진하게 됐다. 경제 위기에 빠진 영국을 구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총리를 롤모델로 삼았지만 날개를 채 펴기도 전에 추락했다. 트러스의 ‘44일 천하’는 세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감세 그리고 ‘양상추’다.
트러스의 총리직 수행은 여왕의 서거로 시작됐다. 취임 이틀 뒤 여왕이 서거했다. 트러스는 여왕이 임명한 15번째 총리였다. 최장수 군주의 마지막 총리가 최단명 총리가 된 것이다. 여왕 서거-찰스 3세 즉위-여왕 장례식 등 취임 첫 2주를 왕실행사로 보낸 트러스는 나흘 뒤 본격적인 정책 행보에 나선다. 소득세 최고세율 폐지, 법인세율 동결 등 대처 전 총리의 ‘트레이드 마크’인 감세를 골자로 한 450억파운드 규모의 경제정책 발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추락을 부른 결정타가 됐다. 재정 전망 없이 발표한 것이 화근이었다. 달러 대비 파운드화는 역대 최저로 추락했고, 국채 금리는 급등했다. 감세안 철회로 급한 불은 껐지만 트러스의 추락까지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지막 일주일은 ‘양상추 조롱’이 지배했다. 대중지 데일리 스타가 지난 14일 “어떤 양상추가 오래 버틸까”라는 질문과 함께 트러스 사진과 실제 양배추를 놓고 온라인 생중계를 시작했다. ‘트러스의 유통기한은 대략 양상추와 같다’고 한 정치 평론가의 농담이 계기가 됐다. 양상추의 유통기한은 보통 10일이라고 한다. 감세안 철회 이후 ‘식물총리’나 다름없던 그에겐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사임 발표 후에는 연 11만5500파운드인 총리 연금을 지급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나왔다. 대중을 고통 속에 빠뜨린 장본인이 무슨 염치로 억대 연금을 받느냐는 불만의 표시다.
“대중을 따라가지 말라. 대중이 당신을 따르게 하라.” 대처가 남긴 명언이다. 이 말을 실천할 기회를 날려버린 트러스가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트러스는 시민과 상대 당은커녕 자신이 이끄는 보수당조차 설득시키지 못했다. 같은 여성이라는 점을 앞세워 ‘제2의 대처’를 자처했지만 겉모습만 흉내낼 뿐 무능을 드러냈다. 트러스의 불명예 퇴진은 콘텐츠가 부족한 지도자의 말로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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