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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경향신문 사설

[사설] 평화헌법 흔드는 일본, 한국은 ‘저자세 외교’만 할 텐가(221215)

일본 정부가 집권 자민당과 연립여당 공명당이 합의한 국가안전보장전략·방위계획대강·중기방위력정비계획 등 3대 안보문서를 16일 개정할 예정이다. 이들 문서는 유사시 중국과 북한의 미사일 기지 등을 공격할 수 있는 ‘적 기지 공격 능력(반격능력)’ 보유, 방위비 5년 내 두 배 증액, 자위대 재편 등을 담고 있다. ‘전수방위(외국을 공격하지 않고 방위를 위한 무력만 행사)’ 원칙을 담은 평화헌법을 사실상 뒤흔들 뿐 아니라, 일본의 군사대국화 길을 연다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3대 안보문서 개정안의 핵심은 반격능력 보유다. 일본이 직접 공격받는 경우는 물론이고, 미국이 공격받아도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사실상 유사시 일본의 선제공격 가능성을 열어놓은 셈이다. 무엇보다 한반도 유사시 일본 자위대가 개입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일본은 반격능력 보유가 평화헌법의 전수방위 개념을 변경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중국과 북한 위협에 따른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 필요성에 따른 것이라는 논리도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경험한 주변국 우려를 무시하는 것이다.
군사대국 일본이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한국 정부 대응은 안이하기 짝이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보도된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일본의 방위비 증대와 관련해 “열도 위로 미사일이 날아가는데 그냥 방치할 수는 없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한국이 일본의 방위비 증액을 용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다. 정부의 대일 외교 논란은 이뿐이 아니다. 외교부는 14일 열릴 예정이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 등 논의를 위한 민관 토론회를 전날 갑자기 취소했다. 민감한 시기를 이유로 댔다지만, 일본 눈치보기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앞서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한민국 인권상(국민훈장 모란장) 수상자로 선정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에 대한 서훈도 외교부에서 절차상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취소됐다. 외교부는 지난 7월엔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자산 강제매각 최종 판단을 미뤄 달라고 대법원에 요청해 반발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하시마(일명 군함도) 탄광에서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 차별이 없었다는 내용을 담은 후속조치 이행경과 보고서를 제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일본이 2015년 하시마 탄광 등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당시 조선인 강제 노역을 알리겠다는 약속과 유네스코의 거듭된 약속 이행 촉구 결정을 거스른 것이다. 정부가 일본의 강제동원 사실을 국제사회에 적극 알렸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정부의 대일 저자세 외교는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 속에서 한·일관계를 개선하려는 윤석열 정부의 움직임과 무관치 않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이 급변하는 만큼 한·미·일 3국의 군사협력 강화는 불가피한 측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는데도 일방적 저자세로 일관하는 것은 양국 관계 개선이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부는 대일 외교에서 확고한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