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일어난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폭력사태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모호한 태도가 비난을 사고 있다. 트럼프는 당일 “ ‘여러 편’에서 나타난 증오와 편견, 폭력의 지독한 장면을 최대한 강력한 표현으로 규탄한다”고 말했다. 사태의 책임이 인종차별주의자만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도 있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더욱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잘못이 명백한데도 이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비난이 일자 백악관은 다음날 트럼프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더 큰 분노와 비난을 샀을 뿐이다. 트럼프는 충격적인 일을 당했을 때 희생자를 위로하고 가해자를 비판하는 국가 지도자의 기본 의무마저 저버렸다.
미국의 인종 갈등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공공장소에서의 흑백 분리와 차별을 규정한 짐 크로법이 1965년까지 존재했다. 하지만 현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정파를 막론하고 인종차별과 그에 따른 폭력을 비난하지 않은 이는 없었다. 트럼프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의 인종주의적 편견과 관련이 있다. 주지하듯 트럼프는 첫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주장을 오랫동안 해왔다. 대선후보 시절에는 일시적으로 무슬림의 미국 입국 금지를 제안하기도 했다. ‘브라이트바트’ 같은 극우 매체를 지지했으며, 그 매체의 설립자인 스티브 배넌을 백악관 수석 전략가로 기용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밝힌 적이 없다. 그러나 트럼프는 인종주의 감정을 끊임없이 자극했고, 그런 그를 지지하는 인종주의자들을 경계하지도 않았다.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는 트럼프는 더 이상 숨어서는 안된다. 타국을 방문 중인 부통령이 “위험한 비주류 단체는 미국에서 설 자리가 없다”고 하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국내 테러”라고 대리 해명을 하게 하는 것은 민주사회 지도자가 할 일은 아니다. 인종주의 폭력을 무시한다면 누가 인권침해국을 비난하는 트럼프의 말을 신뢰할까. 모호한 태도는 그의 도덕적 리더십을 의심하게 할 뿐이다. 만에 하나 자신의 지지 기반인 백인들, 특히 대안 우파 백인들을 의식한 것이라면 소탐대실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지도자로서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지 오래지만 지금이라도 단호하고 명백한 입장 표명과 그에 따른 행동을 해야 한다. 그것만이 더 이상 미국의 분열을 막고 실추된 자신의 명예도 회복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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