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실권자 아웅산 수지가 19일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족 인종청소와 관련해 첫 공식 입장을 밝혔다. 수지는 인종청소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뒤 국제 조사를 피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반대되는 주장이 있다”고 말했다. 사태 원인을 먼저 파악한 뒤 대응하겠다는 논리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본질을 호도하려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무고한 민간인을 해치는 부수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했다”며 군부를 옹호했다. 30분간 연설 동안 미얀마 정부가 테러단체로 규정한 아라칸로힝야구원군을 언급할 때만 로힝야라는 단어를 언급함으로써 ‘로힝야=불법이주자’라는 인식에 여전히 갇혀 있음을 드러냈다. 그의 발언 중 의미 있는 것은 방글라데시로 피신한 난민의 미얀마 송환과 관련된 조치다. 이마저도 확인 절차를 거쳐 선별 수용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실효성에는 의문이 간다.
수지의 모호한 입장 표명은 다분히 국제사회의 비난을 모면하는 동시에 국내 정치적으로도 군부나 대다수 국민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의미 있는 조치를 기대한 국제사회로서는 실망을 금할 길이 없다. 지난달 25일 시작된 이번 사태는 인도주의 재앙이나 다름없다. 최대 1000명이 사망하고, 난민 40여만명이 생겼다. 유엔은 ‘인종청소의 교과서 사례’라고 했다. 그동안 쏟아지는 비난에도 침묵해 온 수지는 “(집권) 18개월은 우리가 직면한 모든 도전과제들을 극복하는데 매우 짧은 시간”이라며 그가 처한 현실을 이해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해 못할 바 아니다. 로힝야 문제는 인종과 종교 문제가 결부된 복잡한 사안이다. 더구나 군부와의 권력분점이라는 타협의 산물로 국가 최고직에 오른 만큼 수지로서는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중국과 미국의 대결 구도 하에 놓인 미얀마의 지정학적 처지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동안 쌓아온 명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이번 처사는 이해하기 힘들다.
국제사회가 수지에게 기대하는 것은 변명에 급급하는 모습이 아니다. 지난 20여년간 군부의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은 당당함과 용기다. 지금 수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것이 더욱 더 필요하다. 그것만이 인종청소의 공범자니 군부의 대변인이니 하는 그에 대한 오명을 벗고 자신의 명예와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다. 그런 수지를 위해서라면 국제사회는 언제든 연대의 손을 내밀 것이다.
'이무기가 쓴 기사 > 경향신문 사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노벨 평화상 받은 핵무기폐기국제운동과 북핵(171009) (0) | 2017.10.08 |
---|---|
[사설]생리대 조사에도 불신이 여전한 이유는 뭔가(170930) (0) | 2017.09.29 |
[사설]생리대 불안 더 이상 방치 말고 전수조사하라(170825) (0) | 2017.08.24 |
[사설]미국 행태 지켜보겠다는 김정은, 대화 아니면 종말이다(170816) (0) | 2017.08.16 |
[사설]백인우월주의 폭력에 눈감은 트럼프의 충격적 태도(170815) (0) | 2017.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