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아랍 간 중동분쟁의 기원은 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구 식민 열강들에 1차 대전은 영토쟁탈전이나 다름없었다. 오스만튀르크 통치하의 중동지역도 열강의 큰 먹잇감이었다. 열강은 중동분쟁의 불씨 세 개를 남겼다. 아랍민족의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한 맥마흔선언(1915), 영국·프랑스·러시아가 분할통치하기로 한 사이크스피코협정(1916),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건국을 처음 약속한 밸푸어선언(1917)이다. 특히 밸푸어선언은 중동분쟁의 출발점이 됐다. 아랍민족의 독립이라는 기존의 약속을 뒤집고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자는 민족주의 운동인 시오니즘에 불을 댕겼기 때문이다. 반면 아랍 독립에는 찬물을 끼얹었다.
1917년 11월2일, 당시 영국 외교부장관 아서 밸푸어는 영국의 유대계 유력인사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서신을 보냈다. 월터는 유대계 금융재벌로 유명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후손으로, 전 세계 유대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다. 밸푸어는 서신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민족국가 건설을 보장하는 약속을 했다. 1차 대전에서 고전하던 영국이 유대인의 영향력을 활용해 미국의 참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단 세 문장으로 이루어진 서신은 유럽 거주 유대인들의 대규모 팔레스타인 이주를 촉발했고, 결국 1948년 5월14일 이스라엘 건국으로 실현됐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다음날 대재앙이라 부르는 나크바 추방이 시작되면서 이스라엘과 아랍권은 4차례나 전쟁을 치르는 피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강자의 힘이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현실은 100년이 지나도 여전하다.
2일로 밸푸어선언이 나온 지 100년이 됐다. 지금 밸푸어는 영국 학교에서 거의 잊혀진 존재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명인사다. 당연히 평가는 극과 극. 이스라엘에서는 영웅, 팔레스타인에서는 역적이다. 밸푸어는 당시 대부분이 그랬듯 제국주의적 오만과 인종적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정치인이었다. 중동분쟁의 원죄인 영국은 밸푸어선언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을 언급한 67개의 단어는 여전히 세상을 흔들고 있다. 조찬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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