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정체불명의 흰 가스가 도시를 덮쳤다. 눈이 타들어가고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도시를 벗어나려는 안간힘도 소용이 없었다. 거리에는 이내 독가스에 중독돼 토하고 쓰러진 사람들의 시신이 넘쳤다. 단 몇 시간 동안의 가스 누출로 최소 3700명에서 최대 2만명이 숨졌다. 50여만명은 극심한 고통과 후유증을 겪었다. 1984년 12월3일 새벽 인도 중부 보팔에 있는 미국 다국적기업 유니언카바이드의 살충제 공장에서 일어난 가스 누출 사고다. 세계 최악의 산업 재해로 불리는 ‘보팔 참사’의 정확한 사상자 수와 참사 원인은 아직도 논쟁 중이다.
보팔 참사는 안전 불감증이 부른 대표적인 인재였다. 미국 공장보다 못한 안전기준, 제대로 안 이뤄진 시설 유지 및 보수, 미흡한 경보체계의 합작품이었다. 유독물질로 인한 산업재해의 심각성에 경종을 울린 이 사고는 화학물질 관리에 대한 안전기준을 강화하고, 지역주민에게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피해자 보상 측면에서는 실패였다. 유니언카바이드는 1989년 인도 최고법원의 화해조정으로 인도 정부에 보상금 4억7000만달러를 지급하는 데 합의했다. 사망자 1명이 받은 배상금은 10만루피(약 162만원)에 불과했다. 대신 회사 측은 모든 민형사상 책임을 면제받았다. 터무니없는 피해보상 탓에 아직도 관련 법정 소송이 진행 중이다.
36년 전 악몽을 떠올리는 사고가 지난 7일 LG화학 인도공장(LG폴리머스)에서 일어났다. 식품 보관 용기 제조 등에 쓰이는 유독가스 스티렌모노머 누출이 원인이었다. 10일 현재 12명이 숨지고, 수천명이 치료를 받았다. 피해 규모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한밤중, 외국기업의 공장, 주변 마을을 덮친 점’이 보팔 참사와 비슷하다. 사고는 코로나19 소식을 밀어낼 정도로 인도에서 관심거리가 됐다. 총리는 국가재난 회의를 소집했다. LG화학은 사고 직후 CEO인 신학철 부회장을 중심으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가동하는 등 발빠른 대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신 부회장의 현장 방문도 추진 중이라 한다. 바람직한 일이다. 사고 원인에 대한 조사는 철저히 하되, 희생자에 대한 적극적인 피해보상과 확실한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는 것이 글로벌기업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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