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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프리즘24]'자유의 여신상'을 욕되게 하지 말라(190902/주간경향 1342호) 이민 강경론자들의 역사 지우기… 기단에 새긴 시구 해석 왜곡 미국 이민당국 책임자인 켄 쿠치넬리 시민이민국(CIS) 국장대행이 지난 8월 15일 워싱턴 국토안보부 본부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 모형을 배경으로 웃으며 셀카를 찍고 있다. 쿠치넬리 국장대행은 셀카를 찍은 뒤 자유의 여신상 모형을 없앴다. 쿠치넬리 트위터 2015년 국내에서 개봉된 미국영화 (감독 제임스 그레이)는 폴란드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 채 여동생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온 에바(마리옹 코티아르 분)가 겪는 애환을 그렸다. 병에 걸린 동생을 이민심사국이 있는 뉴욕만의 엘리스섬에 남겨둔 채 미국 땅을 밟은 에바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는 장면과 먹고살기 위해 분장한 자유의 여신상 모습은 이민에 대한 많은 생각거.. 더보기
[월드 프리즘23]미국서 40년을 산 지미 알다우드는 왜 이라크에서 죽었을까(190826/주간경향 1341호) 트럼프 이민정책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 미국에서 40년간 살았으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불법이민자 강제추방 조치에 따라 이라크로 강제추방된 지 두 달여 만에 사망한 지미 알다우드. / 지미 알다우드 페이스북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낯선 장소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지미 알다우드(41)에게 실제로 일어났다. 지난 6월 4일 오후(현지시간), 알다우드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160㎞ 떨어진 시아파의 성지인 나자프의 알나자프 국제공항 입국장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지난 40년간 살았던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교외로부터 1만㎞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단 한 번도 미국은커녕 디트로이트 인근을 벗어나본 적이 없던 그였다. 가진 거라고는 약 50달러와 당뇨병 치료를 위한 인슐린 몇.. 더보기
[편집국에서17]세 살 아이에게 '소피의 선택' 강요한 미국(190726) 소피는 어린 아들딸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한다. 소피의 미모에 호감을 가진 수용소 장교가 수작을 건다. 그가 묻는다. 폴란드인이냐 공산주의자냐고. 소피는 답한다. 유대인도 아니고, 가톨릭 신자라고. “공산당원이 아니라고?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장교는 단호하다. “예수는 아이들을 나에게 보내지 않았다.” 그는 한 아이를 선택하라고 한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며. 소피가 선택할 수 없다고 하자 선택하지 않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한다. 소피의 입에서 “내 딸을”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한 군인은 울부짖는 딸을 안고 가스실 쪽으로 간다. 그런 딸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소피…. 대표적인 홀로코스트 영화인 (1982)의 명장면이다. 반인륜적 선택을 강요하는 극단적 상황에서 의지와 무관한 선택을.. 더보기
[편집국에서16] 트럼프와 배넌의 결합, 한번으로 족하다(190621)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스티브 배넌을 여전히 필요로 하는가. 주지하다시피 배넌은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당선시킨 일등공신이다. 이 질문이 떠오른 건 두 계기 때문이다. 하나는 지난 18일(현지시간) 있었던 트럼프의 재선 출정식이다. 더 직접적인 건 일주일 전 영국 신문 가디언 보도다. 가디언은 트럼프가 배넌을 재선 캠프에 기용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보도는 야후뉴스 기자인 알렉산더 나자리언이 트럼프 재선 출정식 날에 맞춰 낸 의 내용을 미리 입수한 것에 바탕을 뒀다. 나자리언은 지난 2월 트럼프를 인터뷰했다. 트럼프는 그 자리에서 “지난 6개월 동안 배넌을 4~5차례 봤다”면서 “지금 배넌만큼 나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4개월 전 이야기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배넌과.. 더보기
[편집국에서15]먼로 독트린은 살아 있다(190517) "1800년 이후 미군은 수천 번 중남미에 개입했으며, 수십 차례 점령했다.” 미국 템플대 중남미 전문 역사학자 앨런 맥퍼슨 교수의 주장이다. 미 대외정책 비판가이자 작가인 윌리엄 블룸은 1995년 쓴 에서 1945년 이후 미국이 ‘정권 교체’를 시도한 경우가 55차례 있었다고 했다. 미 여성 평화주의 단체 ‘코드핑크’ 공동설립자 미디아 벤저민은 그 후 13차례 더 있었다고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정권 교체 시도는 적어도 68건이나 된다는 얘기다. 이 가운데 중남미 국가는 얼마나 될까. 에콰도르, 브라질, 페루, 도미니카공화국, 쿠바, 우루과이, 칠레, 볼리비아,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자메이카, 그레나다, 수리남, 니카라과, 파라과이, 엘살바도르, 아이티, 온두라스, 베네수엘라 등 19개국이.. 더보기
[편집국에서14]우리가 이들을 외면한다면(190412) 한 달 전 세계여성의날(3월8일) 때 일이다. 여성의 지위와 권리 향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전 세계에 울려퍼질 때 미국에서는 한 성전환 여성이 투옥됐다. 그는 한때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일지와 국무부 기밀문서를 언론에 공개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유명인사였다. 바로 첼시 매닝이다. 그 일로 매닝은 35년형을 선고받았다. 7년반 넘게 투옥된 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퇴임 이틀 전 감형돼 4개월 후 석방됐다. 자유의 몸이 된 지 1년11개월 만의 재투옥이지만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대다수의 언론과 시민들이 침묵한 탓이다. 투옥 죄목은 법정모독. 그는 자신의 자료를 공개한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에 대한 조사차 제4연방항소법원 대배심에 출석했다. 그는 증언을 거부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대배.. 더보기
[편집국에서13] 김정은, 워싱턴 갈까(190308) 1987년 12월7일, 옛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고르비)가 처음 미국 땅을 밟았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을 서명하기 위해서였다. 옛 소련 지도자로서는 세 번째 방문이었다. 레이건과의 세 번째 회담이기도 했다. INF 조약 서명은 군축과 냉전 종식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이라이트는 다른 데 있었다. 마지막 날 미국인으로부터 받은 환대였다. 백악관에서 차를 타고 가던 고르비는 차를 세우고 군중들에게 다가갔다. 백악관 산책으로 불리는 고르비의 돌발행동에 경호원들은 경악했지만 미국은 고르비 열풍에 사로잡혔다. 고르비 인기는 회담 닷새 뒤 워싱턴포스트 여론조사에서 증명됐다. 고르비에게 우호적 인상을 받은 미국인은 65%였다. 61%를 기록한 레이건보다 더 많았.. 더보기
[편집국에서12]트럼프는 왜 '스타워스'를 쏘아올렸을까(190125)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과 도널드 트럼프는 닮은 점이 많다. 우선 역대 1, 2위 고령 대통령이다. 또 워싱턴 정치와는 거리가 먼 아웃사이더 출신이다. 특히 트럼프는 선출직 경험이 없는 첫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돼서도 옛 직업의 엔터테인먼트 능력을 활용한다는 점도 같다. 하나 더 든다면 두 사람 모두 핵전쟁 두려움에 사로잡혀왔다는 점일 게다. 레이건이 옛 소련과의 핵전쟁 공포에 시달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나온 게 ‘스타워스’로 불리는 전략방위구상(SDI)이다. ‘우주에 탐지와 요격을 위한 센서와 무기를 배치해 적의 미사일을 발사 후 상승단계에서 파괴한다’는 계획은 매혹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천문학적 비용이 들고, 기술적으로 실현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레이.. 더보기
[편집국에서11]연대의 힘, ‘나디에’에서 ‘캐러밴’으로(181214) 마리아를 알게 된 건 멕시코 다큐멘터리 (2005)를 통해서다. 2006년 여름 EBS가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EIDF)에서 소개했으니 벌써 12년이 지났다. 입술을 깨문 채 애써 담담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얼굴에는 불안과 초조, 두려움, 막막함, 절망감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듯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연이 표정 뒤에 감춰져 있는 걸까. ‘나디에’는 스페인어로 ‘하찮은 사람’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뜻한다. 다큐에서는 온두라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중미 3국에서 목숨을 걸고 미국으로 가려는 불법 이민자를 가리킨다. 마리아는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제작진이 마리아를 만난 곳은 멕시코 남동부 베라크루스주 내륙 도시 오리자바에 있는 불.. 더보기
[편집국에서10] 고르비의 선택, 김정은의 선택(181102) 냉전 종식기 미·소 정상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고르비)는 모두 다섯 차례 만났다. 1985년 11월19~21일 스위스 제네바 정상회담이 시작이었다. 강경 냉전 전사 이미지의 레이건과 젊은 새 지도자 고르비의 첫 만남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던 만큼 별 성과는 없었다. 가시적인 성과라면 고르비의 워싱턴 방문 합의 정도였다. 첫발은 내디뎠지만 후속 회담은 쉽지 않았다. 두 정상이 1986년 10월11~12일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다시 만나기까지 약 11개월이 걸렸다.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은 당시 실패한 회담이었지만 훗날 냉전 종식의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군축의 가시적인 첫 성과인 중거리핵전력(INF)협정이 체결된 3차 워싱턴 정상회담(1987년 12월)의 징검다리가 됐기 때문이다. 군축이라는 거대.. 더보기